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평중(平仲), 호는 남곡(南谷). 할아버지는 이정양(李廷亮)이고, 아버지는 이용(李墉)이고, 어머니는 정형진(鄭亨晉)의 딸이다.
1753년(영조 29)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같은해 형 이진항(李鎭恒)과 나란히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제원도찰방(濟原道察訪)·정언·장령·집의에 이어 보덕과 필선으로 세손을 보도(輔導)하였다.
영조가 죽자, 고부 겸 청시승습사(告訃兼請諡承襲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갔으며, 그 뒤 강화부유수·경기도관찰사·도승지·대사헌을 역임하고 벼슬이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그는 경사(經史)에 박통하고 음양술수(陰陽術數)와 손오(孫吳)의 서(書)에도 모르는 것이 없었다.
한편, 서예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어 초서와 해서는 하나의 서체를 이루었다. 관직에 있으면서도 세속에서 벗어난 고결한 인품을 지녔다.
또한, 정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아 벼슬이 높아져도 몸가짐을 마치 한미(寒微)한 선비처럼 하였다. 정조는 평소에 그를 요우(僚友)로서 대하여 남곡이라 불렀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