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명은 설(渫).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급지(汲之), 호는 영호정(映湖亭). 효령대군(孝寧大君)의 7대손이며, 현감 이규빈(李奎賓)의 아들이다. 문음으로 훈련도정이 되고, 보성(寶城)·정평(定平) 및 죽산(竹山) 등지의 수령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 죽산부사로서 왕이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에 이르니 왕이 기특하게 생각하고 특별히 금장식이 달린 허리띠와 그릇[金帶金圈]을 하사하였다. 화의를 강경히 반대하는 소를 올리고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이상원(李尙元)도 집안 장정들을 이끌고 의병을 모집하여 청주에 이르렀으나 화의의 비보를 듣고 통곡하며 돌아갔다. 뒤에 조정에서 그 사실을 알고 『존주절의록(尊周節義錄)』에 기록하였다. 그는 문재에 뛰어났는데, 특히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