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세 때 지은 단편의 논설로서 ≪노사집 蘆沙集≫ 권12에 실려 있다. 이 글의 중심 주제는 이이(李珥)의 이통기국(理通氣局)에 대한 해석에서 자신과 견해 차이가 있는 권우인(權宇仁)의 <이통 理通>에 대한 해석을 비판한 것이다.
비판의 근거가 되고 있는 사상은 <납량사의 納凉私議>·<외필 畏筆> 등에서 명확하게 표현된 기정진의 유리론(唯理論)적 입장이다. 서두와 말미에 권우인의 <이통>에 대한 해석의 위험성을 경계한 말을 간략하게 붙여 두었고, 본론은 자신의 관점과 다른 권우인의 해석을 몇 단계로 논증하고 있다.
기정진은 우선 사물(物)과 이치(理)를 구분해 사물에는 운동과 정지(動靜), 많음과 적음(多寡), 생성과 사멸(生死)이 있으나 이치에는 그것들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운동과 정지, 많음과 적음, 생성과 사멸이 있는 것이 국(局)이며 그렇지 않은 것이 통(通)이라고 규정하고, 통의 의미를 묘(妙)와 연결시킨다.
그는 “통하는 까닭에 이것을 묘(妙)라 하고, 묘한 까닭에 이것을 이(理)라고 한다. 이것은 상천(上天)의 일이며 본연의 실체이니, 인력으로 보태지거나 세월에 따라 늘고 줄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없는 변화가 이것으로부터 생성되어 밤낮을 쉬지 않는다”고 하여 자신의 유리론을 명제화하고, 이를 근거로 이(理)는 운동과 정지, 많음과 적음, 생성과 사멸에 두루 통함을 차례로 논증하였다.
즉, 운동과 정지, 많음과 적음, 생성과 사멸은 서로 대립자이며 상대적으로 구별되는 것이지만, 이묘(理妙)에 의해 대립이 해소되고 하나로 통한다는 것이다.
권우인의 입장은 “기가 있으면 이가 함께 있고, 기가 없어지면 기도 함께 없어진다”는 것으로 보고, 이렇게 본다면 “기가 변화하면 이도 함께 변화하고 두루 통한다는 것도 기가 두루 통하면 이가 함께 두루 통해” 대립을 해소시키는 주체는 기가 된다고 하면서 이것은 이통(理通)이 아니라 기통(氣通)이라고 비판한다.
이러한 결과는 권우인이 근원적인 일리(一理)와 만물의 이(理)사이의 관계에 대한 인식에서 “단지 이(理)를 말한다면 일리만 있고 만리는 없다. 따라서 만물의 이치는 모두 본래 완전히 갖추어진 것이 아니며, 반드시 기가 덧붙여지고 이른바 이가 타는 변화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만리가 된다. 일물이 생생하면 일리가 비로소 생생하고 일물이 소멸하면 일리도 따라서 소멸된다.”고 하여 일리로부터 만리를 연역하는 기정진의 유리론과 대립하는 데에서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이 글은 주기론을 배척하고 이의 보편성에 기초해 전개한 기정진의 유리론적 입장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