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판승(事判僧)과 대응하여 쓰인다. 이판 · 사판의 제도는 억불정책에 의하여 승려들이 천인 대우를 받았던 조선 후기에 생겨났다. 당시의 승려들은 종이를 만들거나 기름을 짜는 등 잡역에 종사하였고, 이에 견디지 못하는 사찰은 폐사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러는 사이에 승려 간에는 이판승・사판승의 두 가지 구별이 생겨났다. 승려들은 주로 참선・간경・ 염불로 수도를 하였던 것인데 참선・염불하는 승려를 수좌(首座)라 하고 간경하는 승려를 주로 강사(講師)라 불렀다. 이들 수좌와 강사는 가급적이면 시끄러움을 피하여 산중의 사암(寺庵)으로 가서 수행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므로 자연 사찰을 운영하고 제반 사무를 맡아 할 승려층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수도하는 공부승(工夫僧)을 이판승이라 하고 사무를 맡아보는 사무승(事務僧)을 사판승이라 하였다.
이판승이 공부에 전념하여 불교의 혜명(慧命)을 끊이지 않게 한 공덕이 크지만, 사찰의 운영을 멀리하고 은둔하였기에 불교의 외형적인 발전에 공헌함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유생과 위정자의 횡포에 짓눌리면서도 불법(佛法)이 끊이지 않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판승의 수행 덕분이었다. 잡무를 멀리하고 깊숙이 은둔하며 지냈던 이판승들이지만, 그들의 공부에 의하여 배척받던 조선시대의 교단이 말기까지 조도(祖道:조사의 가르침)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판승과 사판승은 그 어느 한 쪽이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상호 관계를 갖고 있다. 이판승이 없었다면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사판승이 없었다면 가람이 존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청허(淸虛)・부휴(浮休)・벽암(碧巖)・백곡(百谷) 스님 등 대사들이 이판과 사판을 겸했다. 요즘도 선지식으로 불리는 스님들 중에는 이판과 사판을 병행한 승려들이 많다.
이판승과 사판승에서 유래된 말이 이판사판이다. ‘이판사판’은 일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몰렸을 때 자주 쓰이는 말이다. 불교를 탄압하고 승려를 천시했던 조선시대, 승려가 되는 것은 세상(속세)과 이별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것이 출가인데, 승려가 되려면 이판승과 사판승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므로 궁지에 몰린 상황을 가리켜 ‘이판사판’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