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0년(우왕 6) 12월 예의판서(禮儀判書)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권중화(權仲和)와 함께 명나라에 들어가 금 300냥, 은 1,000냥, 말 450필, 베 4,500필을 바치고 공민왕의 시호와 우왕의 왕위 계승을 요청하였다. 이듬해 7월 밀직부사로 명나라에 말 933필을 바치러 갔으나 요동(遼東)에 이르러 들이지 아니하므로 돌아왔다.
1382년 4월 문하찬성사 김유(金庾) 등과 더불어 명나라에 가서 세공으로 금 100근, 은 1만냥, 베 1만필, 마(麻) 1,000필을 바치려고 요동에 이르렀으나 그 뜻이 성실하지 않다고 하여 다시 돌아왔다. 당시 조정에서는 원나라와 명나라에 대한 양면외교정책을 써서 국제관계가 미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