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424㎝. 쓰러져 방치된 것을 조선 말 익산군수로 부임해 온 최종석(崔鍾奭)이 현재의 위치에 세웠다고 한다. 사다리꼴 돌기둥에 옷자락 무늬뿐 아니라 대좌(臺座)나 신체 부분 등을 겨우 나타낸 불상이다.
머리에는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보물, 1963년 지정)과 같은 사각형의 높은 관(冠)을 쓰고, 그 위에는 한 겹의 사각형 보개(寶蓋)가 있다. 얼굴의 기본 형태도 사각형인데, 볼은 약간 둥글며, 조금 튀어나온 턱이 목 대신 몸통과 얼굴을 구분해주고 있다.
거의 평면에 가까운 안면에 가는 눈과 눈썹 그리고 짧은 코와 작은 입을 음각선으로 나타냈다. 괴량감은 없지만 차분하고 웃음기 머금은 인상적인 상호(相好)임을 느낄 수 있다. 극히 단순하고 형식적인 형태의 귀가 길게 묘사되어 있다. 몸통은 사다리꼴의 사면체 석주(石柱)에 불과하다.
옷은 통견(通肩)으로 양어깨에서부터 평행선을 이루며 내려와 발목에서 좌우로 갈라져 양 측면까지 이어졌다. 옷주름이 신체보다 약간 도드라지게 되어 있으나 무늬는 전혀 없다.
앞으로 모아 배에 붙인 손과 팔의 일부가 음각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좌를 밟고 선 발도 형식적인 묘사에 지나지 않는다. 대좌는 신체보다 약간 커서 앞으로 튀어나와 있으나, 역시 무늬가 없다.
일직선에 가까운 사다리꼴 석주 같은 자세라든지, 극히 단순화된 비사실적 표현 수법, 특히 도포 같은 옷을 걸치고 봉분처럼 쌓아 올린 흙더미 위에 서 있는 모습은 분묘의 문관석인상(文官石人像)과 흡사하다. 그래서 불상이라기보다는 마을을 수호하는 무속적 성격을 띤 석상인 듯하다.
또 이 불상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음력 12월 해일(亥日) 자시(子時)에 두 상이 만나 일년 동안의 회포를 풀고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제자리로 돌아가는 남녀상이라는 풍수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기도 하다.
이 상은 조각 수법이 지극히 단순하여 세부적인 고찰은 어렵지만, 높은 관을 쓴 점이라든지 그 위에 보개를 올려놓은 점 등은 이웃하고 있는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2018년 지정)과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1963년 지정)과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조성 시기는 훨씬 뒤인 고려시대 말엽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