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2월 26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76,056㎡이다. 1986년 봄에 입점리의 한 주민이 우연히 무덤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가 금동제관모(金銅製冠帽) 등 내부에 있는 유물들을 꺼내어 당국에 신고함으로써 알려졌다. 1986년 가을에 이 고분군의 중요성 때문에 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유산연구원)에서 긴급히 일대의 무덤 8기를 발굴하게 됨으로써 무덤의 구조와 성격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후 1998년에는 이 고분군의 정비 일환으로 이뤄진 원광대 마한 · 백제문화연구소의 조사에서 추가로 13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이 고분군은 1986년의 8기와 1998년의 13기 등 모두 21기가 조사되었으며, 이 중 백제고분은 19기로 확인되었다. 백제고분 19기는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11기, 앞트기식돌덧널무덤〔橫口式石槨墓〕1기,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7기로 유형 분류된다.
고분군 가운데 제1호분은 외형의 봉토 밑지름 약 15m, 높이 약 2m이다. 발굴조사 결과 풍화된 암반을 경사면에서 ‘ㄴ’자 형태로 따내고 돌방〔石室〕을 쌓아 만들었는데, 네 벽은 자연 산돌을 사용하여 편평한 면을 고르게 맞추어 쌓아올리면서 80∼90㎝ 높이까지는 수직으로, 그 위로는 네벽을 맞죄어 이른바 궁륭형(穹窿形)의 천장을 만들어 천장돌로 30∼40㎝ 크기의 뚜껑돌 4개로 덮었다.
널길〔羨道〕은 동벽에 붙여서 남쪽으로 마련되고 널길입구 밖으로 너비 13∼15㎝의 배수로가 340㎝까지 뻗쳐 있다. 널방의 크기는 268×240×240㎝이며, 널길은 158×85×116㎝이다. 발굴조사 당시 출토된 유물로서는 금동제장신구류 · 금동제신발 · 말재갈 · 철제발걸이 · 토기 · 중국산청자항아리 · 화살통장식 · 금귀걸이 · 유리구슬 등이 있다.
특히, 제1호분에서 출토된 금동제관모는 어린문(魚鱗文)을 안에서 밖으로 항해 압출(壓出)하고 어린문이 끝나는 밑부분에는 작은 점열을 같은 수법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문양내기 방법은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이나 일본의 구마모토현〔熊本縣〕후나야마고분〔船山古墳〕출토품과 유사하다.
관모는 제작기법상 일반적으로 양옆을 대는 넓은 두 판과 이 두 판을 접합시키기 위한 단면 ‘U’자형 외연부의 세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관모의 윗부분은 외연부로서 두 판을 꼭 눌러 부착시켰다. 관모 후면에 있는 반구형(半球形) 장식은 속이 빈 대롱형을 ‘S’자형으로 구부려 관모 쪽은 2개의 못으로 고정시키고 윗부분은 대롱형을 5갈래로 나눈 후 반구형 장식을 위로 향하도록 밑부분에 끼워 넣은 후에 구부려 고정시켰다.
이 반구형 장식은 일본 후나야마 출토품의 경우 밑으로 향하여 부착시켰는데 입점리고분의 관모와 반대방향이어서 이채롭다. 후나야마 출토품은 관모에 달개〔瓔珞〕가 매달렸던 얇은 구리실〔銅絲〕이 꼬여 있으나 입점리고분 출토품은 흔적이 없어 다소 차이를 보인다.
신촌리 9호 독무덤〔甕棺墓〕에서 출토된 관모는 주변의 다른 독무덤에서 출토된 관모와의 비교에서 다소의 의견이 있으나 4세기 이후로 판단된다. 일본의 후나야마고분에서 출토된 관모는 함께 출토된 여러 유물 및 무덤구조 등으로 보아 6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입점리고분의 관모에 비해 후나야마에서 출토된 것은 금동판을 투조(透彫)하여 초화문을 표현한 양식과 또 주연부에 덧대어 만든 윤대(輪臺)에 구슬을 달기 위한 구리실이 꼬여 있는 점으로 보아 후나야마고분 출토품이 좀 더 발전된 양식으로 보인다.
금동제신발의 경우 입점리 1호분과 신촌리 9호분, 일본 후나야마고분에서 모두 1점씩 출토되었다. 입점리에서 출토된 신발이 일본 후나야마 출토품보다 신촌리 9호분 출토품에 더 가까운 형태를 보이고 있다. 입점리 1호분 신발은 부장용으로만 속단할 수 없는 몇가지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바닥에 박은 징을 볼 때 보존처리 결과 발 뒷축부분에 박힌 징은 어느 것이나 닳아 끝이 뭉툭한 상태였으며 신발 코 부분에 박힌 징은 날카롭게 남아 있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신발 코부분이 위쪽으로 좀 들려 있어 힘을 덜 받음으로서 나타난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좌측 신발의 가장 뒤편 좌측 징의 바닥면에는 가로 0.9m, 세로 1m 크기의 얇은 네모모양 철판을 이용하여 보수한 흔적이 뚜렷한데, 실제 사용한 후의 보수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입점리고분에서 출토된 관모는 당시 백제와 일본간의 문화교류를 연구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그리고 이곳에 분포되어 있는 무덤들은 5세기경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로 설명이 가능하다. 먼저 백제에서는 판석으로 만든 돌널〔石棺〕이 6세기 이후에야 유행했는데 입점리고분보다 후대인 일본 후나야마고분에서 그러한 돌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6세기경의 관모와 입점리고분의 것을 비교해 볼 때 입점리고분의 관모는 4세기 이후∼6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