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자정(子瀞). 공조판서 임유겸(任由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묘서영 임간(任幹)이고, 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임익신(任翊臣)이며, 어머니는 완산이씨(完山李氏)로 이원기(李元紀)의 딸이다.
1609년(광해군 1) 사마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가 재사(才士)로서 이름을 떨쳤으나, 정치가 어지러움을 보고 낙향하여 공직에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순릉참봉이 되었다가 이듬해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풍저창직장(豐儲倉直長)을 거쳐 승정원주서·성균관전적·호조낭관·병조낭관을 지내고, 1628년(인조 6) 정언(正言), 1632년 지평을 지냈으며, 지방수령으로 나가 함종현령과 영광군수를 지냈다.
다시 중앙관직에 돌아와 홍문관수찬·사헌부장령·필선이 되고 암행어사로 평안도지방에 내려가 지방행정을 바로잡았다. 또, 균전사(均田使)가 되어 영남지방을 돌아보고 토지행정을 바로 잡았다.
첨지중추부사로서 통신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으며, 그 뒤 좌승지·한성우윤이 되었다. 그 때 남쪽지방에 소요가 있었으므로 삼남주사검찰사(三南舟師檢察使)가 되어 삼도수군을 순찰하고 돌아와 형조참판이 되고 오위도총부부총관을 겸하였다.
충주목사·안동부사를 거쳐 1642년 황해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도승지를 지내고, 이듬해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김육(金堉)과 함께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환국하게 되었을 때 이들을 수행하기 위하여 청나라에 갔다가 1644년 그곳에서 죽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