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궁(慈壽宮)은 세종이 승하한 후 문종이 선왕의 후궁(後宮)들을 모여 살도록 하기 위해 설치한 궁가(宮家)였으며,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옥인동에 있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은 선왕 세종의 후궁들이 함께 살 수 있도록 궁가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후궁 여러 명이 함께 살기 위해서는 규모가 큰 집이 있어야 했는데, 이때에는 태조와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며, 태조의 세자 방석(芳碩)의 형이었던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의 사저를 수리하고, 이곳을 자수궁으로 지정하였다.
성종 대에는 폐비 윤씨가 지위가 강등되어 잠시 이곳에 거처하였고, 세조의 후궁 근빈 박씨(謹嬪 朴氏)도 거처하였다. 중종 대에는 성종의 후궁 숙의 홍씨(淑儀 洪氏)가, 인종 대에는 중종의 후궁들이 이곳에 살았으며, 명종 대에는 인종의 후궁 숙의 정씨(淑儀 鄭氏)가 자수궁에 거처하였다.
선왕 후궁들의 처소로 설치된 궁가는 세종 대 세워진 의빈궁(懿嬪宮)을 비롯하여 여러 곳이 있었다. 이러한 선왕 후궁들의 궁가는 후궁들이 사망하면 폐지되었고, 중종 이후로 자수궁과 후궁들의 질병가로 설치된 인수궁(仁壽宮)만 유지되었다. 자수궁에는 선왕의 후궁들을 보필하기 위해 궁녀와 내관들이 배속되었으며, 세조 대에는 별감(別監)과 소친시(小親侍) 6명이 배속되었다.
자수궁은 비구니 불당으로서 불사(佛事)의 기능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후궁들은 선왕이 승하한 후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기도 하였다. 1494년(성종 25) 자수궁에서 큰 불사가 거행된 후 연산군은 1504년(연산군 10) 후궁들이 비구니가 되는 것을 금지하였으나, 중종 대 이후 자수궁에서 자주 불사가 이루어졌다. 이후 자수궁은 불당의 역할을 하였으며, 명종이 즉위한 후 불사는 더욱 성행하였다. 1563년(명종 18) 자수궁을 새로 지었고, 재(齋)를 올리며 불당으로서의 기능이 더욱 강화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자수궁은 크게 훼손되었고, 궁가 유지를 위한 재정도 부족하게 되었다. 한편 양란 이후 후궁들은 자녀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비해 국왕의 후궁이 줄어들게 되면서 자수궁은 선왕 후궁의 궁가로서보다 비구니 사찰로서의 기능이 더 커졌으나 1661년(현종 2)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