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연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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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채
장연채
건축
인물
해방 이후 미군정청 건축서장, 대림건설 기술고문, 부사장 등을 역임한 건축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1년(고종 38)
사망 연도
1976년
출생지
경기도 의정부
목차
정의
해방 이후 미군정청 건축서장, 대림건설 기술고문, 부사장 등을 역임한 건축가.
내용

경기도 의정부 출생으로 1907년 경상북도 영해군수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그곳에 가서 영해보통학교를 다녔다. 1911년 서울로 돌아와 재동(齋洞)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훗날 경기중고등학교)를 이균상(李均相)과 함께 다녔다.

1920년에는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하여 이원식(李元植)과 건축과 동기가 되었다. 한국인 건축과 선배로는 경성고등공업학교의 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박길룡(朴吉龍)·이기인(李起寅)·김세연(金世演)이 있었다. 학제가 바뀌어 경성고등공업학교가 되면서 그는 제1회 입학,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1924년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조선총독부에 들어가 고원(雇員)·기수(技手)를 거치면서 일제의 관학건축(官學建築)을 섭렵하였다. 1942년에는 최고의 기술직위인 기사(技師, 오늘날의 국장급)에 임명되었다. 또한, 그는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는 해에 조선건축회(朝鮮建築會)에 가입,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 시기에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 병동(현 서울대학교 부속)의 설계 감리를 하였으며, 미쓰코시백화점(三越百貨店, 현 신세계백화점)의 구조계산도 담당하였다. 1946년 9월 미군정청 건축서장(建築署長)에 임명되어 1948년 새 정부수립 때까지 우리나라 건축계의 과도기를 구축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한편 광복으로 공백기를 맞게 된 조선건축회를 인수, 조선건축기술단(朝鮮建築技術團)을 발족시켜 오늘날 대한건축학회(大韓建築學會)의 기틀을 잡는 데 공헌하였으며, 이때 김세연·김순하(金舜河) 등과 함께 그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1948년 이후 건설업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여, 한때는 건설회사를 스스로 이끌어나갔으나 1949년부터 대림산업(大林産業)에 들어가 기술고문·부사장의 소임을 맡아 부흥기 건설업계에 헌신하였다. 1966년 대림건설(大林建設)을 퇴직하기까지 1950∼1960년대 건설산업계의 장로의 역할을 하였다. 1973년에는 대한건축학회 학회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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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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