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원숙(元淑), 호는 성암(惺菴). 경상북도 예천 출신. 장재안(張載安)의 아들이다.
일찍이 예천군 수서기(首書記)로 있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그 직을 사임하고 민중의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다. 또 1907년 고종의 헤이그특사파견을 계기로 일제가 고종을 위협하여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무력으로 체결하자, 구국 항일운동을 실천하기 위하여 그 해 7월에 각처의 의사(義士)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강년(李康秊)이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강년의 휘하에 들어가 풍기·봉화·예천·용궁·문경 등지를 중심으로 일본헌병분파소·일본군사기지·일본경찰분서 등을 습격하여 건물을 소각하거나 순검·경찰보조원 또는 친일반역분자 등을 사살하였다.
특히, 1907년 9월중에는 이강년·민긍호(閔肯鎬)의 의병진과 연합하여, 의병 1,000여명을 이끌고 문경읍 갈평리에서 일본경찰과 군인이 인솔하는 일본경찰대 및 수비대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일본경찰 3명과 한인 순검 2명을 사살하였다.
또, 같은달 16일에도 의병 300여명을 이끌고 상주읍을 습격하여 대구수비대 소속 다나카[田中]대위가 거느린 1개중대의 일본군과 격전을 전개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의병진이 크게 패하고 장윤덕도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일본수비대의 모진 고문 속에서도 의병에 관한 정보를 밝히지 않았으며, 총살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