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정치우(鄭致右). 일명 관직(寬直). 자는 백온(伯溫), 호는 동암(東巖). 경상북도 영천 출신이다.
1888년(고종 25) 의금부의 금부도사를 지냈으며, 1894년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에 임명되어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그 해 겨울 다시 토포사(討捕使)에 임명되어 고종의 밀지를 받고 황해도 지방의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태의원시종관(太醫院侍從官)이 되었다.
1899년 삼남검찰 겸 토포사(三南檢察兼討捕使)로 삼남 일대의 민정을 두루 살펴보았다. 1900년 도찰사에 임명되어 농민들의 원성이 높은 경주부윤을 파면하다 오히려 봉세관(俸稅官)에 의해 구금되었다.
석방된 뒤 관직에 뜻이 없어 사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다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제수되었다. 1905년 일제의 강권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이 정환직에게 밀지를 보내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할 것을 권하였다.
그 뒤 관직을 사직하고 아들 정용기(鄭鏞基)로 하여금, 고향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게 한 뒤 서울로 진격하여 황제를 구하고 국권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정용기가 청송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석방된 뒤 의병활동이 부진하므로 이를 독려하고자 1907년 9월 19일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해 10월 7일 정용기가 입암에서 영천수비대소속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 순절하자, 정순기(鄭純基)·이세기(李世紀)·우재룡(禹在龍) 등의 추대를 받아 삼남의병부대 의병장에 올랐다. 그 뒤 군세가 크게 떨치기 시작하자 여세를 몰아 동쪽으로 포항 등지, 서쪽으로 신령 등지, 북쪽으로 청송 등지를 공격하여 일본군 수비대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전투 중 사상 당하는 의병이 속출하자 전의가 크게 떨어져, 이에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각지에 소모군을 파견,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와 함께 무기와 탄약·군량 등을 준비하며, 국민들의 반일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전념하였다.
이 때 병이 들어 신병을 치료하다 일본군 수비대에게 잡혔다. 일본군이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끝까지 반일의 뜻을 굽히지 않다 총살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