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인(才人)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주로 창우(倡優) 등의 기예나 도살에 종사하던 천한 계층이다. 재인은 화척과 마찬가지로 여진이나 거란의 유종(遺種)으로 파악되는데, 호적에 등록되지 않은 채 그들만의 촌락을 형성하여 집단적으로 거주하거나 유랑하였다. 일반 백성들이 이들을 다른 부류로 간주하여 서로 혼인조차 하지 않자, 세종 때 백정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재인을 재백정(才白丁)으로 부르는 등 재인에 대한 명칭이 사라지지 않았으며, 조선 중기 이후 천인 신분으로 굳어졌다.
재인은 곡예 · 음악 · 춤 등의 기예에 종사하였지만, 화척과 마찬가지로 유기(柳器) · 피물(皮物)의 제조와 도살 · 수렵 · 육류 판매 등으로 생활하였다. 이들은 가무와 도축을 병행하다가 조선 중기 이후에는 주로 창극(唱劇) 등의 기예(技藝)에 종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 양인들은 재인과 화척을 다른 부류로 여겨 함께 거주하거나 혼인하기를 꺼려하였으며, 이들도 자기들끼리 집단으로 생활하며 혼인하였다. 재인은 여러 지역을 돌며 일시 거주하는 유랑 생활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걸식 · 강도 · 방화 · 살인 등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는 재인과 화척을 추쇄하여 서북면의 수졸(戍卒)에 충당하기도 하였고, 우왕 때에는 이들 중에서 활쏘기와 말타기에 익숙한 자들을 가려 뽑아서 군사에 동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려 말에는 재인과 화척이 왜적을 가장해 민가를 약탈하자, 조준(趙浚)은 이들을 조사해 호적을 작성하고 빈 땅을 주어서 평민처럼 농사를 짓게 하자고 건의하였다. 하지만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재인의 유랑과 노략질의 문제는 여전하였다.
1392년(태조 1)에는 화척과 재인이 떠돌아다니면서 도적질하고 소와 말을 도살하므로 호적에 올리고 농사를 짓도록 하였으며, 1404(태종 4)에는 이들 가운데 활과 말에 능한 자는 시위군에 속하게 하였다. 1414년(태종 14)에 이르러 재인이 내자시(內資寺)에 세공(稅貢)으로 저화(楮貨) 50장을 바치던 것을 없애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농업에 종사하면서 군역을 부담하는 자만 면제시키도록 하였다.
1423년(세종 5)에 재인과 화척이 본래 양인인데도 하는 일이 천하고 칭호가 특수하여 백성들이 다른 종류로 보고 서로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한다면서 칭호를 백정(白丁)으로 고치고 일반 양인과의 섞여 살고 혼인하는 것을 장려하였다. 또, 이들을 찾아내 각 방(坊)과 촌(村)별로 보호하며, 장적을 만들어 형조 · 한성부(漢城府) · 감영(監營) 및 각 고을에 보관했다가 출생 · 사망 · 도망 등의 사항을 점검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재인을 재백정(才白丁)으로 부르는 등 차별이 여전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재인이라 표기되어 있어 조정의 정책이 성과를 본 것 같지는 않지만, 16세기를 계기로 점차 양인으로 동화되어 갔으며, 농경 생활에 정착하게 되었다.
한편, 재인은 유목민 출신으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해, 고려 말의 왜구 격퇴와 1419년(세종 원년)의 대마도(對馬島) 정벌, 초적(草賊)의 체포와 이시애의 난(李施愛의 亂)의 진압 등 외적 방어와 내란 평정에 동원되어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이들의 무예가 크게 인정받으면서, 세종 대 이후에는 취재(取才)를 통해 갑사(甲士) · 별패(別牌) · 시위패(侍衛牌) 등의 군인으로 편입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