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득우 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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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에 있는 조선시대 공신 · 무신 전득우를 비롯한 남양전씨 3대의 묘역. 시도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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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에 있는 조선시대 공신 · 무신 전득우를 비롯한 남양전씨 3대의 묘역. 시도기념물.
개설

고려 말 조선 초의 장군 전득우의 무덤을 비롯하여 부친 전주, 아들 전흥 등 3대의 묘역으로,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 봉정리에 위치한다. 1980년 10월 23일에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내용

전득우(田得雨)는『가승(家乘)』에 따르면, 고려 말에 태어났으나 정확한 생몰 연대를 알 수 없다. 부친 전주(田柱)는 고려가 망할 무렵, 왕이 아닌 자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던 까닭에 공주로 유배되었고, 이후 노비가 되어 그곳에서 시봉했으며, 계속적으로 이성계(李成桂)의 건국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아들 전흥(田興)은 이방원(李芳遠: 뒤의 태종)의 사병으로서 도진무가 되어 제1차 왕자의 난과 제2차 왕자의 난에 행동대로 활약하여 공을 세웠다.

이후 그 공을 기반으로 의금부에서 실권을 행사하게 되자, 신분 회복의 기회로 삼았다. 이 때문에 그는 헌사에 호소하여 ‘종파명심양적(宗派明甚良籍)’이란 변별을 받아 원종공신에 녹훈되어 지위가 의금부제조에 이르렀다. 1427년(세종 9) 세종은 그의 부친인 전득우를 가선대부 한성부윤에 증직하고, 모친에게는 정부인에 제수하여 비석을 하사하고 준예장(準禮葬)하였다.

묘는 본래 부여군 석성현 우곤면 외산(달외매 불걱산: 현재 충청남도 논산시 성동면 우곤리)에 안장하였다. 그러다가 1565년(명종 20) 이후 지금의 자리인 아들 전흥의 묘 위쪽에 이장하였다.

묘소의 양식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것이다. 봉분은 조선초기의 대표적 형식인 방형의 모습이다. 하단에는 화강암으로 호석을 둘렀다. 전면의 호석은 길이 277cm, 두께 약 20cm 가량의 판석 1매를 세웠다. 좌우 측면에는 3매를 나란히 세웠는데 길이는 407cm이고, 후면에는 2매의 판석을 세웠다. 호석의 지상 높이는 약 60cm이다.

봉분 주위에는 높이가 낮은 석벽을 세웠다. 봉분의 전면에는 세종이 하사한 묘비가 있다. 묘비에는 ‘선덕2년(宣德二年) 정미3월초8일(丁未三月初八日)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한성부윤전득우(漢城府尹田得雨) 처증정부인정씨지묘(妻贈貞夫人鄭氏之墓)’라고 기록되어 있다. 묘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그 앞 좌우로 문인석 1쌍을 세웠다. 묘역은 낮은 석축을 쌓아 모두 3단으로 만들었다.

참고문헌

『문화재대관』(충청남도, 1996)
『부여군지』(부여군, 1987)
문화재청(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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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최근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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