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무과에 급제하여 1482년(성종 13) 전주판관이 되고, 그 뒤 계속하여 훈련원판관·첨지중추부사·전라우도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1492년 회령부사, 1500년(연산군 6) 해랑도초무사(海浪島招撫使), 1504년 좌상대장(左廂大將)을 거쳐 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그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07년(중종 2) 한성부판윤·권중추부사가 되었다.
한성부판윤 역임 중에 회산군 염(檜山君恬)의 집이 지나치게 가옥 건축 규정에 벗어남을 바로잡기도 하였다. 청백리로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엄격한 성격으로 아들이 행패를 부린 데 대하여 격분하여 살해하고도 태연자약하였다.
그가 병이 들었을 때 찾아온 친구 김전(金詮)과 큰 그릇으로 술을 나누어 마시고 난 뒤 김전이 집 밖을 나서기 전에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호는 위절(威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