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운상 영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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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무관 전운상(田雲祥, 1694∼1760)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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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의 무관 전운상(田雲祥, 1694∼1760)의 초상화.
구성 및 형식

1995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가로 88.0㎝, 세로 136.5㎝. 조선 후기의 무신 전운상(田雲祥)을 그린 초상화이다. 전운상은 1717년 24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함경도 부사로 있을 때 어진 정치를 베풀어 왕의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내용

전운상의 영정은 단령(團領 : 관원이 평소 집무복으로 착용한 상복)과 사모관대로 정장한 관복본 초상으로서, 표피(豹皮)를 두른 교의자(交椅子)에 정면으로 앉아서 두 손을 마주잡고 의자에 앉은 전신상이다. 엄격한 좌우대칭으로 조선시대에 드문 정면 초상의 형식을 취했다는 점에서 「전일상연정」과 유사하다. 이처럼 정면성이 강조된 초상화는 본래 중국의 명나라에서 상용되던 형식으로, 17세기 초 조선에 전래되기 시작하여 17세기 후반경 일시적으로 유행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반우향의 전신상이 크게 유행하면서 정면초상은 많이 그리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18세기 중반경에 그려진 것으로 생각되는 전운상의 영정이 정면관을 택하고 있는 것은 당시로서는 다소 예외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조선의 고식(古式)을 따른 고풍스러운 초상화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그 무렵 중국에서 그려온 중국풍의 초상화 형식을 따른 이국적 풍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정면관의 초상화가 크게 유행하지 않았던 것은 자세가 너무 엄격하여 경직된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고도의 단축법과 명암법을 구사하지 않으면 주인공의 신체적 특징을 성공적으로 표출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운상의 초상화는 정면관을 택함으로써 오히려 장군의 특징적 풍모라고 할 수 있는 당당하고 호방한 분위기를 더욱 잘 전해 주는 효과를 얻고 있다. 이 전운상의 초상화보다 앞선 시기인 1748년경에 김희겸(金喜謙)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동생 전일상(田日祥)의 정면관 초상화를 염두에 두고 그와 같은 자세를 제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일상의 초상화가 매우 풍만한 체구여서 엄청났다는 그의 힘을 잘 표현하고 있는 반면에, 전운상의 초상화는 다소 세장(細長)하고 날렵한 체구여서 그의 뛰어난 지략을 잘 전해 주고 있는 듯하다.

두 초상화는 화법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전운상의 초상화도 김희겸의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전운상의 초상화는 회화적인 맛은 다소 덜하지만 더욱 정교한 기법을 보여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보다 정치한 투시법을 구사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전일상의 초상화보다 조금 뒤에 그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세부적인 화법은 대체로 18세기 중반경의 특징을 많이 보여 주고 있다.

사모(紗帽)는 모정(帽頂)이 높다. 양쪽으로 뻗은 날개가 좁고 길며 바깥쪽보다 모정에 붙은 안쪽이 약간 더 좁아서 언뜻 보면 ‘八’자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은 가벼운 상승감을 준다. 이는 날개가 넓고 짧았던 17세기의 사모나 날개가 좁고 길되 좌우로 수평하게 뻗었던 18세기 초반의 사모와 달리 18세기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뒤 18세기 후반에 널리 유행했던 형태이다. 원형의 사모는 농묵으로 칠하고 명암의 차이는 전혀 표현하지 않았다. 이도 18세기 후반과는 다른 18세기 중반 이전의 질박한 표현법이다.

얼굴은 분홍색을 배채(背彩)하고 물기를 머금은 갈색의 필선으로 약간의 굵기와 농담의 차이를 주어 가며 윤곽선과 주름선을 묘사하였다. 그 다음 얼굴 전체를 다소 강한 느낌이 들 정도의 붉은색으로 담채(淡彩 : 엷은 채색)하였다. 다시 주름선 옆에 옅은 갈색을 가볍게 선염(渲染 : 색칠할 때 한쪽을 진하게 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엷고 흐리게 하는 일)하여 미세하나마 명암을 표현했다.

속눈썹이 있는 위 눈꺼풀 부분은 강하고 짙은 먹선을 덧그어 전신(傳神)의 요체가 되는 눈을 강조했다. 그리고 흰자위의 양 끝에 약간의 홍기를 준 다음 안쪽의 눈동자 바로 옆 부분은 흰색을 살짝 가해 색상과 명암을 표현했다.

콧구멍의 내부는 중묵(中墨)으로 칠해 더욱 강하게 명암을 표현했다. 뺨, 코, 턱 부분에는 얼굴보다 더욱 붉은 홍기(紅氣)를 주어 왕성한 혈색을 강조했다. 귀는 얼굴보다 붉은 빛을 적게 주어 여린 살색과 함께 얼굴 뒤쪽에 위치한 후퇴감을 표현하였다.

단령의 옷주름은 물기가 약간 적은 듯한 농묵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필속(筆速)과 필세(筆勢)는 물론이고 붓의 시작 부분[起筆釘頭]과 전절(轉折 : 뚝 끊어짐)까지 의식하면서 강하고 절도 있게 묘사했다.

이는 초상 전체에 매우 강직한 느낌을 부여함으로써 장군 초상화에 어울리는 호무한 분위기를 연출해 주고 있다. 양쪽 어깨선은 처음 그린 것보다 약간 더 높게 수정하여 덧그렸다. 이것도 장군으로서의 당당한 풍모를 더욱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단령의 복색은 밝은 녹색을 배채한 뒤 운문(雲文) 이외의 부분을 짙은 녹색으로 칠하였다. 그 다음 주름선 주변을 가볍게 녹색으로 우려서 미약하나마 주름에 따른 관복의 명암을 표현하였다.

흉배는 자색 바탕에 적황녹청(赤黃綠靑)의 운기문(雲氣文)을 그린 다음, 해치 한 마리를 수놓은 해치 흉배이다. 채색은 다소 묽고 탁한 편이되 해치의 흰색은 뒤에서 배채하고 눈에는 은분을 칠했다. 관대는 학정 금대(鶴頂金帶)이다. 금분과 은분을 사용하여 시각적 효과를 강조했다.

교의자의 손잡이와 받침대는 농묵의 굵은 필선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전면을 짙은 먹으로 동일하게 칠해 명암의 차이를 전혀 표현하지 않았다. 의답(椅踏)은 가는 먹선으로 윤곽선을 그린 다음 적색과 청색을 후채하고 돗자리 부분에는 황색을 담채했다. 이는 나뭇결과 돗자리 무늬를 상세하고 정치하게 묘사하던 통상적인 묘법과는 다소 다른 표현법이다.

표피(豹皮)는 다소 물기가 적은 황갈색으로 터럭을 일일이 묘사하였다. 그 뒤에 먹으로 동그란 무늬를 그린 다음 다시 흰색 터럭을 덧그렸다. 또한 양쪽 옆구리 부분에 표피의 네 발을 대칭으로 배치하고 모두 노출시켰다.

발이나 꼬리를 교의자와 의답 앞쪽으로 끌어당겨 강조했던 18세기 전반경과 달리 신체와 교의자의 뒤쪽으로 후퇴시켜 배치하였다. 이는 18세기 중반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18세기 후반에 가장 널리 사용된 방식이다.

비단은 올이 고르고 촘촘한 편이지만 폭이 좁아 세 폭을 결봉하여 사용하였다. 가운데 폭은 넓고 가장자리의 양 폭은 좁다. 보존 상태가 대체로 양호한 편이고, 조선시대의 족자 표구도 원형대로 잘 남아 있다.

참고문헌

『초상화의 비밀』(국립중앙박물관, 2011)
『한국의 초상화』(문화재청 편, 눌와, 2007)
『한국의 초상화』(조선미, 돌베개, 1983)
문화재청(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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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강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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