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정추(鄭樞). 자는 공권(公權)인데, 뒷날 자를 이름으로 썼다. 호는 원재(圓齋).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정포(鄭誧)의 아들이다.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급제하였고 예문검열을 거쳐 좌사의대부에 올랐다.
1366년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을 탄핵하다가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였으나, 이색(李穡)의 구원으로 동래현령으로 좌천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371년 신돈이 제거된 뒤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다시 발탁되었다.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우왕 즉위 후 좌대언·첨서밀직사사(詹書密直司事)가 되었는데, 1376년(우왕 2) 태(胎)를 예안현(禮安縣)에 안장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 뒤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제수되었고, 수성익조공신(輸誠翊祚功臣)에 올랐다.
성품이 공검하고 근후하여 관직에 있을 때 항상 정도를 행하였다. 당시 가묘제도(家廟制度)가 폐지되었으나, 제기를 별실에 간직하여두고 제삿날을 당하면 반드시 손수 씻어서 제사에 쓰도록 하였다.
나라의 일이 권신의 손에 좌우되는 것을 한탄하다가 병사하였다. 저서로는 『원재집(圓齋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