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4년(명종 4) 서경에서 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으키자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로서 절령역(岊嶺驛: 자비령) 부근에서 습격을 받은 원수 윤인첨(尹鱗瞻)을 구원하였다. 이 해에 섭대장군(攝大將軍, 종3품)으로 지병마사(知兵馬使)가 되어 서경을 다시 공격하였고, 12월에는 종군(從軍)하던 승려 종참(宗旵) 등을 시켜 이의방을 처단하고 그 도당들을 살해하였다. 이에 따라 정중부정권의 성립에 공헌하여 권력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여러 폐단을 끼치기도 하였다. 1176년(명종 6)에는 여러 영부(領府)의 군인들이 정권을 마음대로 처단하는 것을 비방하자 승선(承宣)에서 해직되기를 요청하였다.
1178년(명종 8)에는 좌승선(左承宣, 정3품)으로 개성의 광덕리(廣德里)에 있는 태후의 옛 별궁을 사제(私第)로 삼았으나 왕이 이를 막지 못하였다. 오랫동안 지병부장주(知兵部掌奏)로 무관의 전선(銓選)을 장악했는데, 서반(西班)의 청탁이 많은 것을 싫어하여 이듬해인 1179년(명종 9)에 좌승선 지병부사(左承宣知兵部事)에서 지도성사(知都省事, 종2품)로 옮겼다.
장군 경대승이 평소부터 정중부의 소행에 대하여 분노하였으며, 또한 그 아들 정균이 명종의 공주(公主)를 처로 삼을 마음을 품고 있었으므로 임금도 걱정하고 있었다. 이에 1179년(명종 9) 9월에 아버지 정중부와 함께 전횡을 일삼다가 장군 경대승 · 허승(許升) 등에 의하여 살해됨으로써 정중부정권은 붕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