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 ()

고려시대사
유적
개성특별시 개풍군 해선리에 있는 고려 후기 제31대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의 능.
유적/고인돌·고분·능묘
양식
건립 시기
1372년(공민왕 21)
관련 국가
고려
관련 인물
노국대장공주|공민왕
높이
650㎝
지름
137㎝
소재지
개성특별시 개풍군
내용 요약

정릉(正陵)은 개성특별시 개풍군 해선리에 있는 고려 후기 제31대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의 능이다. 1365년 2월 공주가 난산 끝에 죽자 4월 정릉에 안장하였다. 이후 7년간 환관 김사행이 지휘 감독을 하여 4도감 13색의 제도를 갖추고 영전과 무덤 공사에 힘을 쏟아 조영하여, 1372년 공민왕의 수릉인 현릉과 나란히 쌍릉으로 완성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이다.

정의
개성특별시 개풍군 해선리에 있는 고려 후기 제31대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의 능.
건립경위

공민왕 14년(1365) 2월 왕후인 노국대장공주가 난산 끝에 죽자, 공민왕은 왕후의 상장례에 국력을 총동원하기 위해 4도감 13색을 본격적으로 설치 · 운영하였다. 4도감 중 국장도감, 빈전도감, 주1, 주2 중 정릉의 조성은 조묘도감이 주관하였다.

13색은 산소영반색, 법위의색, 상유색, 유거색, 제기색, 상복색, 반혼색, 복완색, 소조색, 관곽색, 묘실색, 포진색, 진영색이다. 이 중 산소영반색은 왕릉에서 이루어지는 불교 법회와 관련하였고, 법위의색과 상유색 및 유거색은 상여를 만들고 꾸몄으며, 묘실색에서는 무덤 내부의 묘실을, 관곽색은 시신을 담을 관곽을, 복완색은 상복을, 제기색은 제기류를, 진영색은 노국대장공주의 주3을 그렸다.

1366년(공민왕 15) 왕후의 혼전인 인희전(仁熙殿)에 자주 방문하여 많은 행사를 거행하였고, 환관 김사행(金師幸)에게 4도감 13색의 지휘 감독을 맡겨 자신의 수릉인 현릉은 정릉의 서쪽에 쌍릉 형식으로 조영토록 하였다. 1372년(공민왕 21) 정릉과 함께 공민왕의 수릉인 현릉까지 쌍릉 형식으로 조성하고 문무석인상을 비롯한 능묘 석물을 화려하게 장식하여 완공하였다.

이듬해 1373년(공민왕 22) 왕륜사(王輪寺)의 동남쪽에 왕후의 주4을 건립하였으며, 1374년(공민왕 23) 9월 공민왕의 사후 정릉의 서쪽 현릉에 묻혔다. 노국대장공주의 신주는 1376년(우왕 2) 11월 기해일에 공민왕의 신주를 태묘에 모실 때 함께 부묘되어 제사를 지냈다.

변천

공민왕은 1370년(공민왕 19)에 수릉호(守陵戶)를 두고 원찰로 운암사(후일 창화사, 광암사, 보제사로 개칭함)를 지정하여 불사를 크게 일으키고 정릉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정릉은 공민왕의 현릉과 함께 잘 관리되어 『 조선왕조실록』이나 주5』 및 『 여조왕릉등록』 등에 기록되어 있다.

1905년 이후 1920년까지 일본은 13회에 걸쳐 도굴하였고, 당시 정릉(正陵)의 주6이 새겨진 주7가 도굴되어 알려지기도 하였다. 이후 땜질 정도로 수리가 되어 수십 년간 방치하여 황폐화되었다가, 광복 후 1956년에 이르러 북한 당국에서 비로소 보수를 하였다. 이때 현정릉의 주8 내부를 조사하면서 벽화를 모사하여, 현재 개성특별시에 있는 고려박물관에 진열하고 있다.

형태와 특징

노국대장공주의 정릉은 공민왕의 현릉과 함께 현재 개성특별시 서쪽 교외 봉명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무선봉의 나지막한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능역은 동서 폭이 약 50m, 남북 길이가 45m 범위의 주9의 능 3계와 이어지는 경사면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 경사면 중앙에 계단을 두어서 능에 오르내리도록 하고 있으며, 중앙 계단의 좌우에도 석축을 쌓았다. 그 경사면 아래 평지에 주10이 서고, 정자각 서북쪽 축대 아래 주11으로 장식된 대석을 가진 사각의 소전대를 두었다.

능역 상단에는 동북서 방향에 3m 높이의 곡담을 ㄷ 자 모양으로 두르고 현정릉 두 봉분을 가까이 붙여서 나란히 배치하여 쌍릉을 이루고 있다. 봉토의 높이는 약 650㎝이며, 지름은 137㎝이다. 봉분 아래쪽을 주12, 주13, 면석, 만석, 주14으로 이루어진 12각의 주15을 두르고 있다.

난간석은 병풍석 밖으로 평행하여 돌리고 있는데 두 능이 가까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각기 겹치는 부분의 난간을 생략하고 각각 10각씩 연결하고 있다. 석난간 밖으로 각각 주16 4기, 주17 4기를 교대로 배치하고 있다. 능 앞에 주18을 하나씩 배치하고 그 아래 5개의 북 모양의 받침돌로 받쳐 넣고 있으며, 주19 사방에 귀면상의 나어두를 새기고 있다.

제1층단 동서 양쪽에는 주20을 마주 세웠는데 팔각의 이중 기단 위에 세운 팔각 석주와 그 위의 주두부로 이루어져 있다. 팔각 석주의 중상부에는 구멍 뚫은 귀가 달려 있다. 두 능의 정면에는 각각 소맷돌이 달린 계단을 만들고, 그 양쪽에 작은 계단이 있어 오르내리게 하고 있다.

제2층단에는 각 능의 정면에 장명등을 하나씩 두었다. 장명등은 하대석과 상대 받침을 앙복련으로 장식하고, 중대석은 사면에 주21을 새겼으며 그 가운데에 3보주를 새기고 있다. 중심이 되는 구슬에는 태극이 새겨져 있다. 장명등 좌우에는 주22 2쌍을 세웠는데, 복두에 주23을 입은 입상이다.

제3층단은 제2층단보다 140㎝ 낮게 되었고 중앙에 한 개, 양쪽에 두 개의 계단을 두어 제2층단과 연결하고 있다. 제3층단에는 양쪽에 주24 2쌍이 서 있는데 갑옷에 투구를 쓰고 검을 차고 있다. 위쪽의 무석인은 가슴에 손을 모으고 다른 하나는 검을 짚고 선 형상이다.

고려왕릉 중 확실하게 문석인과 차별하여 무석인을 세운 예는 거의 없으며, 현정릉에 와서 비로소 갑옷으로 무장한 무석인을 세움으로써 이후 조선 왕릉의 주25을 갖추는 제도의 모본이 되고 있다. 문석인과 무석인의 크기는 키가 각각 330㎝이다. 하계에는 가운데와 양옆의 돌계단이 있으며 여기에서 정자각과의 높이 차이는 10m이다. 맨 아래 석축에서 223m 떨어져서 서쪽에 운암사지가 있다.

의의 및 평가

노국대장공주의 정릉은 공민왕의 수릉인 현릉과 함께 4도감 13색을 설치하고 환관 김사행의 지휘 감독을 받아 조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왕릉 중 능제가 완비되고 보존 상태가 좋으며, 석인상과 석수상을 비롯한 각종 능묘 석물의 조각적 수준도 매우 우수하다. 왕릉인 현릉과 왕후릉인 정릉이 쌍릉을 이룬 형식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최초의 능묘 형식이다.

이후 조선 전기 제2대 정종정안왕후후릉이나 제3대 태종원경왕후헌릉 등 왕후가 먼저 죽고 국왕이 수릉으로서 자신의 왕릉을 조영할 때 왕릉과 왕후릉을 쌍릉 형식으로 조영하는 데 양식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정릉은 봉분 주위에 석호상과 석양상을 배치하고, 능묘 앞에 주26, 장명등 및 망주석, 문석인상과 무석인상 및 정자각을 배치하는 등 능묘 석물의 제도를 완비하여 1406년 조선 제1대 태조비 신의왕후제릉을 비롯한 조선왕후릉의 전형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
『여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

단행본

장경희, 『고려왕릉(증보판)』(예맥, 2013)
김인철, 『고려왕릉연구』(사회과학출판사, 2010)
장경희, 『고려왕릉』(예맥, 2008)
조선과학백과사전출판사, 한국평화문제연구소, 『조선향토대백과』(평화문제연구소, 2005)
김인철, 『고려무덤 발굴보고』(백산자료원, 2003)
『조선고적조사보고(朝鮮古墳調査報告)』(조선총독부, 1916)

논문

이승민, 「고려시대 국상 의례와 조문 사행 연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8)
윤기엽, 「고려 혼전의 설치와 기능」(『한국사상사학』 45, 2013)
장경희, 「조선 태조비 신의왕후 제릉 연구」(『미술사학연구』 263, 2009)
김일권, 「고구려의 천문 문화와 그 역사적 계승: 고려시대의 능묘천문도와 벽화무덤을 중심으로」(『고구려연구』 22, 2006)
임영애, 「개성 공민왕릉 석인상 연구」(『강좌미술사』 17, 2001)
전주농, 「고려 공민왕 현릉 발굴 개보」(『문화유산』 4, 1960)

인터넷 자료

이북오도청(https://ibuk5do.go.kr/)
주석
주1

임금이나 왕비의 능을 새로 만들 때 임시로 두던 기관.    우리말샘

주2

재를 올리는 의식을 감독하는 승려.    우리말샘

주3

주로 얼굴을 그린 화상(畫像). 또는 얼굴을 찍은 사진.    우리말샘

주4

임금의 초상을 모신 전각.    우리말샘

주5

조선 성종의 명(命)에 따라 노사신 등이 편찬한 우리나라의 지리서. ≪대명일통지≫를 참고하여 우리나라 각 도(道)의 지리ㆍ풍속과 그 밖의 사항을 기록하였다. 특히 누정(樓亭), 불우(佛宇), 고적(古跡), 제영(題詠) 따위의 조(條)에는 역대 명가(名家)의 시와 기문도 풍부하게 실려 있다. 55권 25책의 활자본.    우리말샘

주6

쇠붙이와 돌, 살림살이에 쓰는 그릇 따위에 새겨 놓은 글.    우리말샘

주7

상감 기법을 이용하여 무늬를 넣은 청자.    우리말샘

주8

시체가 안치되어 있는 무덤 속의 방.    우리말샘

주9

내각(內角)이 모두 직각인 사각형. 주로 정사각형이 아닌 것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10

왕릉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봉분 앞에 ‘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우리말샘

주11

단청에서, 연꽃이 위로 향한 것과 아래로 향한 것을 함께 그린 그림.    우리말샘

주12

건축물을 세우기 위하여 잡은 터에 쌓은 돌.    우리말샘

주13

지대나 축대 등의 귀퉁이에 쌓는 돌.    우리말샘

주14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사람의 형상. 왕릉이나 지체 높은 사람의 무덤 앞에 세우며, 문석인ㆍ무석인ㆍ동자석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15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우리말샘

주16

왕릉이나 큰 무덤 주위에 돌로 만들어 세운 호랑이.    우리말샘

주17

왕릉이나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돌로 만든 양 모양의 조각물.    우리말샘

주18

무덤 앞에 제물을 차려 놓기 위하여 넓적한 돌로 만들어 놓은 상.    우리말샘

주19

무덤 앞의 상석을 괴는 북 모양으로 생긴 둥근 돌.    우리말샘

주20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돌 받침 위에 여덟모 진 기둥을 세우고 맨 꼭대기에 둥근 대가리를 얹는다.    우리말샘

주21

안상연에 새긴 장식.    우리말샘

주22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우리말샘

주23

삼국 시대부터 관원(官員)이 평상시 조정(朝廷)에 나아갈 때 입던 제복. 신라 진덕 여왕 2년(648)부터 착용하기 시작하였는데, 머리에는 복두를 쓰고, 곡령(曲領)에 소매가 넓은 옷을 입었으며, 손에는 홀(笏)을 들었다.    우리말샘

주24

능(陵) 앞에 세우는 무관(武官) 형상으로 만든 돌. 능 앞 셋째 줄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하나씩 세운다.    우리말샘

주25

왕릉이나 지체 높은 사람의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문무관의 형상.    우리말샘

주26

넋이 나와 놀도록 한 돌이라는 뜻으로, 상석(床石)과 무덤 사이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집필자
장경희(한서대학교 교수)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