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명숙(明叔), 호는 야수(野叟).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진(鄭津)이며, 아버지는 정속(鄭束)이다.
1447년(세종 29)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정과로 급제, 정자가 되고, 감찰을 거쳐 예조좌랑으로 궐내에서 다른 관리들과 더불어 기생을 불러들여 가무음주한 죄로 장형(杖刑)을 받았다. 1455년(세조 1) 교리로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사간을 거쳐 예조정랑으로 가례색도감낭청(嘉禮色都監郎廳)을 겸직, 이어 사인 재직시에 또 한번 기생을 불러들여 음주한 죄로 장형을 받았다. 1464년 좌간의대부·공조참의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고, 이듬해 진주에 살던 소훈(昭訓) 윤씨(尹氏)의 어머니 병환을 잘 돌보지 않았다는 죄로 의금부의 국문을 받고 파직되었다.
1466년 함길도절도사·변정원(辨定院: 掌隷院)의 판결사를 거쳐,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2년(성종 3) 병조참판·평안도관찰사·형조판서·중추부지사·황해도관찰사·평안도관찰사·행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489년 우참찬이 되었다.
이어 호조판서·세자시강원빈객·경상도순변사를 거쳐 1492년 우찬성, 1494년 공조판서로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를 겸직하였다. 이듬해 판중추부사, 이어 우의정에 승진되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으나 이해 용렬하고 탐학한 재상이라는 탄핵을 받고 영중추부사로 체직, 영경연사를 겸직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조정대신들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을 대역죄인으로 논단하고 부관참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시호는 양경(良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