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왕석(王奭), 초명은 왕서(王瑞). 공양왕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순비 노씨(純妃 盧氏)이다.
1389년(공양왕 1)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391년 전정당문학(前政堂文學) 이원굉(李元紘)의 딸을 맞이하여 세자비로 삼았다.
그 해 겨울 명나라 서울에 가서 하정(賀正)할 때 시중 심덕부(沈德符)와 설장수(偰長壽), 밀직부사 민개(閔開) 등이 시종하였는데, 하정표전(賀正表箋)의 주계(奏啓)에 모두 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장남 정성군 석으로 표기하였다.
그런데 명나라 황제가 매우 사랑하여 공(公)·후(侯) 밑에 서차(序次)하도록 대우해 주었으며, 내전에서 다섯 차례에 걸쳐서 향연을 베풀어주고, 황금 2정(錠), 백금(白金) 10정, 견단 100필을 하사하였다. 다음해에 귀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