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충 초상 및 중모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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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충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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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정수충(鄭守忠, 1401∼1460)의 초상화 및 이 초상의 중모(重摹) 내역을 기록한 필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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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정수충(鄭守忠, 1401∼1460)의 초상화 및 이 초상의 중모(重摹) 내역을 기록한 필사본.
개설

1987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정수충의 초상화는 15세기 좌익공신상의 원본을 충실히 전하고 있다기보다는 후대의 이모(移模) 과정에서 상당 부분이 왜곡되고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정중모기』에 의하면 1865년에 화사(畵師) 이덕명(李德明)이 이 영저을 중모하였다. 중모의 원본은 금릉(金陵)의 종가에서 봉안해 오던 영정이며, 1769년에 이모했던 것이라 한다. 금릉 봉안본은 6·25전쟁 당시 피난할 때 분실되어 현전하지 않는다.

내용
  1. 정수충 초상

정수충의 초상화는 그 도상이 현재 좌익공신상의 모습을 전해 주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청원(淸原) 문의영당(文義影堂) 소장 신숙주상(申叔舟像)과 언뜻 상통되는 듯한 특징들을 보여 주고 있다. 오사모(烏紗帽)의 모정(帽頂)이 높고 뾰쪽하며 양 날개가 길고 가늘어서 아래로 ‘八’자처럼 늘어져 있는 것이 그렇다. 그리고 단령(團領: 깃을 둥글게 만든 공복)의 소매가 좁고 목 부분에 드러난 중의(中衣)가 푸른색이며 단령의 아래 자락이 좌우로 넓게 퍼져 있는 것도 흡사하다. 조선 중·후기의 초상화들이 통상 어깨보다 허리 부분이 더욱 넓어서 신체가 마름모 형태를 취하였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정적이고 단정한 느낌을 주었다.

또한 어깨가 넓게 벌어지고 허리 부분이 잘록하며 치마가 좌우로 넓게 퍼져서 신체가 크게 상하 두 덩어리로 이분되면서 다소 동적이고 호방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15세기의 초상화들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모습이다. 의답(椅踏)의 윗면에 돗자리를 표현하지 않고 전체를 푸른색으로 칠한 것도 신숙주상과 같다.

그러나 교의자(交椅子)의 팔걸이가 조각 장식처럼 기형화되어 있고 받침대도 없다. 뿐만 아니라 교의자에 묶인 끈 매듭이 생략되어 있는 점이나, 흉배가 조악한 내용의 쌍학 흉배인데다가 목화(木靴)를 푸른색으로 채색한 점 등은 신숙주상과 다른 모습이다. 따라서 이 정수충의 영정은 15세기 좌익공신상의 원본을 충실히 전하고 있다기보다는 후대의 이모(移模) 과정에서 상당 부분이 왜곡되고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법은 다소 조악한 가운데 19세기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배채법(背彩法)을 매우 전면적으로 사용하여 거의 모든 색을 동일 채색으로 배채하고 있다. 얼굴은 흰색기가 많은 분홍색으로 배채하였다. 농담과 굵기에 변화를 준 먹선으로 윤곽선과 주름선을 선묘(線描)하였다. 그 뒤 주름선 주변을 붉은색으로 가볍게 선염(渲染: 색칠할 때 한쪽을 진하게 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엷고 흐리게 하는 일)하여 명암을 표현했다.

연분(鉛粉: 白粉)을 사용했기 때문인지 오른쪽 뺨과 코 부분이 흑갈색으로 변색되었다. 단령은 붉은기가 도는 분홍색을 배채한 위에 농담 차이가 적은 중묵 필선으로 윤곽선과 주름선을 서서히 잡은 다음 다시 그 위에 가늘고 짙은 먹선을 덧그어 강조하였다.

주름선 주변에는 농담의 차이를 주어 가며 붉은색으로 선염하여 명암을 표현하였다. 그 뒤 안감이 노출된 부분에 푸른색과 붉은색 진채(眞彩: 진하고 강하게 쓰는 채색)를 후채하였다. 단령의 옷주름 필선은 신숙주 상보다는 덜 양식화되어 신체의 입체적 구조와 단령의 다양한 표정을 보다 상세히 포착한 편이다.

흉배는 아래쪽에 파도문과 화초문을 그리고 위쪽에 구름을 그린 뒤 중앙에 학 두 마리를 그리되 배경의 상하변에 청색과 홍색으로 동그란 점을 수없이 장식하였다. 모든 색을 배채한 다음 위에서 다시 진채로 후채하였다.

그러나 그림이 매우 조악하고 안료의 질이 다소 낮아서 조선 후기의 통상적인 쌍학 흉배의 도상이나 풍격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사모는 농담 변화가 없는 짙은 농묵(濃墨: 짙은 먹물)으로 전면을 칠하였다. 그리고 삽금대(鈒金帶)는 금분을 입혔다.

비단의 가장자리에는 네 변을 따라 자주색 필선으로 사각형의 테두리를 둘렀다. 이는 중모 시 원본의 크기를 전하려는 배려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비단은 올이 가늘지만 조직은 매우 듬성한데 폭이 좁아 세 번을 결봉하여 사용했고, 아교를 많이 올려 표면이 매우 번질거린다. 현재는 액자 표구로 개장되어 원래의 족자 모습을 잃은 상태이다.

  1. 영정중모기

『영정중모기』는 이 정수충의 영정을 이모하고 봉안한 내력과 소요 물품 및 경비를 상세히 기록한 필사본이다. 크기는 세로 27.5㎝ 가로 32㎝이며 선장정(線裝幀)이다. 먼저 1판부터 2판까지는 영정 중모의 전 과정이 요약되어 있다. 영정이 퇴락하여 1851년부터 1855년까지 문중에서 14,800문(文)의 경비를 모았다. 그 뒤 마침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황간현(黃澗縣: 영동군 황간면)에 와 있던 삼가현(三嘉縣: 합천군 삼가면)의 화사(畵師) 이덕명(李德明)을 초빙하였다.

그리고 강당(講堂)의 서재방(西齋房)에서 1856년 2월 23일부터 3월 8일까지 중모하였다. 3월 10일 사당에 봉안하였다. 3판부터 6판까지는 초상화 중모 및 화가에게 들어간 품목과 경비가 기록되어 있다.

서울에서 사온 비단 10척 5촌이 4량 1전이고, 채색 값이 20량이며, 화가에 사준 담배(南草) 2근이 3전 2푼이라는 등 세목별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당시의 제작비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6판 뒷면부터 마지막의 9판까지는 영정을 다시 사당에 봉안할 때 소용된 물품과 경비 및 의식 담당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한국의 초상화 : 형과 영의 예술』(조선미, 돌베개, 2009)
『한국의 초상화』(문화재청 편, 눌와, 2007)
문화재청(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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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강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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