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근부(謹夫). 정침(鄭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연경(鄭延慶)이고, 아버지는 진사 정희검(鄭希儉)이며, 어머니는 신승준(申承濬)의 딸이다.
1516년(중종 11) 생원이 되고, 1533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1537년 박사에 이어 정언·지평·장령·교리·응교·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546년(명종 1) 직제학으로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사옹원정·검상·사인 등을 지냈고, 1547년 부제학으로 재임시 양재역(良才驛)에서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권세를 자행(恣行)하여 나라가 장차 망하려고 하니 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 이기·정순붕(鄭順朋) 등에게 알림으로써 벽서사건을 일으켰다.
이로 인하여 을사사화의 잔당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하여 봉성군(鳳城君: 중종의 아들)·송인수(宋麟壽)·이약빙(李若氷) 등을 죽이고, 권벌(權橃)·이언적(李彦迪) 등 20여명을 유배시킴으로써 윤원형(尹元衡)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하였으며, 그 권세를 빌려 온갖 횡포를 자행하였다.
도승지·판결사를 거쳐 1551년 전라도관찰사로서 이열(李悅)의 노비를 약탈하여 파직되기도 하였다. 1555년 동지중추부사로 다시 등용,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경상도관찰사·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1556년 경기도관찰사로 있을 때 사고로 죽었다. 1570년(선조 3) 관작이 추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