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영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경상도관찰사, 한성부판윤, 우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인길(仁吉)
항재(恒齋)
시호
정헌(靖憲)
이칭
팔계군(八溪君)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13년(중종 8)
사망 연도
1589년(선조 22)
본관
초계(草溪)
주요 관직
우찬성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전기에, 경상도관찰사, 한성부판윤, 우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인길(仁吉), 호는 항재(恒齋). 정온(鄭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윤겸(鄭允謙)이고, 아버지는 현감 정숙(鄭淑)이며, 어머니는 충의위(忠義衛) 김계훈(金季勳)의 딸이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40년(중종 35) 사마양시에 모두 합격하고, 154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검열이 되고, 1547년(명종 2) 호조정랑·헌납 등을 거쳐 뒤에 부수찬·교리 등을 지냈다. 1552년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공조참판이 되었다.

강원도관찰사 때는 도민들을 안무(安撫)하고,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여서는 서북지방인이 무예를 좋아하고 문교(文敎)를 싫어하는 지방이라는 형세를 감안하여 평양에 서원과 서적포를 설립하여 학문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뒤 팔계군(八溪君)에 습봉(襲封)되었다.

1562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윤원형(尹元衡)에게 아부하여 부정행위를 자행하는 수령들을 응징하고, 내전의 힘을 빌려 발호하는 요승(妖僧)을 제거하였다. 1567년 한성부판윤으로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육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우찬성으로 사직하였다.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항재집』이 있다. 원주의 칠봉서원(七峰書院)에 봉향되었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사마방목(司馬榜目)』
『국조고사(國朝故事)』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