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휴길(休吉), 호는 화강(花岡). 영의정 정인지(鄭麟趾)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현감 정득열(鄭得說)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로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 강종경(姜宗慶)의 딸이다.
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15년 이이첨(李爾瞻)이 정조(鄭造)·윤인(尹訒)·이위경(李偉卿) 등을 사주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을 제기하자,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이원익(李元翼)이 그 부당성을 극력 논박하다가 유배당하였다.
이에 대하여 유생 홍무적(洪茂績)·김효성(金孝誠) 등과 더불어 이른바 논척조인(論斥造訒)의 상소를 올려 이원익을 변호하고, 이이첨 일파를 치죄할 것을 극력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남해의 절도에 유배되었으며, 어머니 강씨(姜氏)가 함께 배소에 기거하다가 1616년에 죽자 애통 끝에 실명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에 지평, 순조조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부여의 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결(忠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