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계회(季晦), 호는 유헌(遊軒). 풍저창부승(豊儲倉副丞) 정한우(丁旱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생서주부 정휘(丁暉)이고, 아버지는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 정세명(丁世名)이며, 어머니는 사의(司議) 김수형(金壽亨)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36년(중종 31)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지평·병조정랑·형조정랑 등을 지냈다. 1544년 정랑으로 있을 때 간관에 의하여 6품 미만의 자급(資級)으로 정5품직에 임명되었다는 이유로 관작외람(官爵猥濫)의 논박을 받기도 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 수렴청정하던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인종의 장사(葬事)를 서둘러 갈장(渴葬)으로 치르려고 하는 데 대하여 당시 모든 관원들이 그 기세에 눌려 침묵하고 있을 때 극력 반대하여 의례대로 장사를 거행하게 하였다.
1546년(명종 1) 검상을 거쳐 사인으로 있을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 소윤 윤원형(尹元衡) 등의 외척이 권세를 잡자 그 일파인 이기(李芑)의 논계로 인하여 파직, 남원으로 돌아갔다.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곤양에 유배, 이듬해 거제로 이배되었고, 배소에서 죽었다.
천품이 정직하고 항상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입신의 근본을 삼았다. 1708년(숙종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남원의 영천서원(寧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유헌집』 4권 3책과 배소에서 지은 『부훤록(負暄錄)』·『장행통고(壯行通考)』 각 10여권이 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