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원룡(元龍). 정결(鄭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유의(鄭有義)이고, 아버지는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 정구(鄭球)이며, 어머니는 광주김씨로 사지(司紙) 김중문(金仲文)의 딸이다. 승지 정원(鄭源)의 종질(從姪)이다.
1528년(중종 23) 진사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에 보직되었다. 이어 정언으로서 상처하였을 때 김안로(金安老)가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여 사위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이로 인하여 김안로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도사·광흥창수(廣興倉守)·사복시첨정 등의 한직으로 전전하다가, 1537년 김안로가 제거된 뒤 수찬·정언·교리·헌납 등 청요직(淸要職)에 중용되었다.
1541년 지평으로서 그 해의 흉황(凶荒)과 수령의 폐해를 조사하기 위하여 별견어사(別遣御史)로 파견되었고, 1544년 세자시강원우필선·장령을 지냈다.
이듬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권세를 잡게 된 소윤의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정순붕(鄭順朋)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의 윤임(尹任)·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제거하려 하였을 때 극력 반대하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용천(龍川)으로 유배가던 도중에 죽었다.
1547년(명종 2) 정미사화 때 죄가 추가되어 가산을 적몰당하였다. 1568년(선조 1)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고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적몰된 가산도 환급받았다. 시호는 의민(毅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