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등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교리, 지평, 장령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원룡(元龍)
시호
의민(毅敏)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06년(중종 1)
사망 연도
1545년(명종 즉위년)
본관
동래(東萊)
주요 관직
교리|지평|장령
관련 사건
을사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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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교리, 지평, 장령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원룡(元龍). 정결(鄭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유의(鄭有義)이고, 아버지는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 정구(鄭球)이며, 어머니는 광주김씨로 사지(司紙) 김중문(金仲文)의 딸이다. 승지 정원(鄭源)의 종질(從姪)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28년(중종 23) 진사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에 보직되었다. 이어 정언으로서 상처하였을 때 김안로(金安老)가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여 사위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이로 인하여 김안로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도사·광흥창수(廣興倉守)·사복시첨정 등의 한직으로 전전하다가, 1537년 김안로가 제거된 뒤 수찬·정언·교리·헌납 등 청요직(淸要職)에 중용되었다.

1541년 지평으로서 그 해의 흉황(凶荒)과 수령의 폐해를 조사하기 위하여 별견어사(別遣御史)로 파견되었고, 1544년 세자시강원우필선·장령을 지냈다.

이듬해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권세를 잡게 된 소윤의 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정순붕(鄭順朋)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의 윤임(尹任)·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제거하려 하였을 때 극력 반대하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용천(龍川)으로 유배가던 도중에 죽었다.

1547년(명종 2) 정미사화 때 죄가 추가되어 가산을 적몰당하였다. 1568년(선조 1)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고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적몰된 가산도 환급받았다. 시호는 의민(毅敏)이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인종실록(仁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월사집(月沙集)』
『악록집(岳麓集)』
『용주유고(龍洲遺稿)』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대동야승(大東野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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