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규서무(百揆庶務)와 간쟁봉박(諫諍封駁)을 관장하던 도첨의부의 전신으로는 국초에 내의성(內議省)을 두었다가 982년(성종 1)에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으로 고치고 장관으로 내사령(內史令)과 문하시중(門下侍中)을 두었고, 1061년(문종 15)에 이를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으로 고쳤다.
1275년(충렬왕 1)에 원나라의 영향 아래 중서문하성은 상서성(尙書省)을 병합하여 첨의부(僉議府)로 개편하고 장관으로 좌우(左右)의 첨의중찬(僉議中贊) 각 1인을 두었으며, 뒤이어 이를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로 고쳤고, 1298년에 충선왕이 왕위에 올라 개혁정치를 하면서 첨의중찬을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고쳤다가 다시 중찬으로 고쳤다.
1308년에 충선왕이 재즉위하면서 중찬을 정승(政丞)으로 고쳐 1인으로 하였고, 1354년(공민왕 3)에 이를 다시 시중으로 고쳤다가 2년 뒤에 공민왕이 국권회복정책을 쓰면서 중서문하성을 부활하고 시중제를 문하시중과 수시중(守侍中)으로 개편하였다.
1362년에 중서문하성을 다시 도첨의부(都僉議府)로 고치고 그 이듬해 시중제를 좌시중(左侍中)과 우시중(右侍中)으로 고쳤고, 1369년에 도첨의부를 문하부(門下府)로 고침으로써 문하좌시중, 문하우시중이라 하다가 창왕 때 시중제를 시중과 수시중으로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