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40여세손인 비왕(否王)의 아들이다. 왕위를 계승한 지 얼마 안 되어, 중국대륙에서 내란이 일어났는데, 이를 피해 연(燕) · 제(齊) · 조(趙)나라 등의 백성들이 기자조선으로 도망해 오자 준왕은 이들을 서쪽지방에 살게 하였다. 그 뒤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노관(盧綰)을 연나라 왕으로 삼았다.
그러나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노관의 부하였던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은 호복(胡服)을 입고 기자조선으로 건너와 준왕에게 복속하였다. 준왕은 위만을 박사로 삼고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으나, 기원전 194∼180년 사이에 서쪽 방면의 유이민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준왕은 위만에게 쫓겨 측근 신하만을 거느리고 뱃길로 남하하여 한반도 지역에 와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사기』 조선전(朝鮮傳)에 따르면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남쪽으로 온 시기는 효혜고후(孝惠高后) 때(기원전 195∼180)이다. 준왕이 남쪽으로 옮겨온 지역에 관해서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종래 『제왕운기』 · 『고려사』 · 『세종실록지리지』 ·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는 준왕의 도읍지를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으로 지목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의 실학자들은 한결같이 익산지역을 준왕의 남쪽 이주지역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경기도 광주 경안(京安)이나 충청남도 직산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준왕은 남쪽으로 옮겨와 진국(辰國)을 중심으로 세력기반을 형성했으나, 마한의 진왕(辰王)에게 격파당해 소멸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여 년의 사직을 누려온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비록 위만에게 쫓겨 남쪽으로 내려오기는 했지만, 그가 마한사회에 끼친 문화적 영향력은 여러 면에서 의미가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