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양(驪陽). 자는 대중(大中), 호는 명와(明窩). 경남 함안군(咸安郡) 우곡리(愚谷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생원 진한국(陳翰國)이며. 어머니는 철성이씨(鐵城李氏) 이택동(李宅東)의 딸이다.
1609년(광해군 1)『삼행록(三行錄)』 1권을 편집하였고, 성균관에 들어가 성리학(性理學)에 전념했다. 1638년(인조 16) 호란(胡亂)의 굴욕을 보복하기 위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원병(援兵)을 요청하고 귀국하여 창의(倡義)했다.
향리에서 우곡정사(愚谷精舍)를 건립하고 호란(胡亂)의 굴욕으로 인한 울분을 시(詩)로서 달래며, 후진 양성과 학문에 정진했다. 향사례(鄕射禮)·사례계(四禮契)를 운영하여 종족(宗族)을 구휼하였다.
평소에 『소학』을 즐겨 읽었으며, 숭명사상(崇明思想)이 철저하며, 창의사상(倡義思想)이 투철했다. 통정대부승정원동부승지(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에 증직되었다. 저서로는 『삼행록(三行錄)』 1권·『황명보록(皇明寶錄)』 1권·『명와유고(明窩遺稿)』 3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