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선조 25)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7일 간 계속되었다. 왜군은 진주가 전라도로 가는 경상우도의 대읍이며, 경상우도의 주력군이 진주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진주성 공격계획을 세웠다.
적장 하세가와(長谷川秀一)·나가오카(長岡忠興) 등은 9월 24일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집결지 김해를 떠나 노현(露峴)·창원·함안을 거쳐 마현(馬峴)과 불천(佛遷)으로 나누어 쳐들어왔다.
이러한 적군의 동태를 접한 경상우도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은 각지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때 진주에는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이끄는 군사 3,700여 명과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의 군사 100여 명밖에 없었다.
10월 5일 적의 선봉 1,000여 기(騎)가 진주 동쪽 마현의 북봉에 출현하자, 김성일은 남녀노소까지 동원해 무장시켜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6일 적군은 3개 부대로 나누어 1대는 동문 밖 순천당(順天堂) 산 위에 진을 치고 성을 내려다보며, 1대는 개경원(開慶院)에서 동문을 지나 봉명루(鳳鳴樓) 앞에 진을 치고, 또 1대는 향교 뒷산에서 똑바로 순천당을 지나서 봉명루 앞에 있는 적군과 합세하였다. 왜군의 조총수들은 성 안으로 총포를 난사하였다. 그리고 초막을 짓고 밤에는 불을 피워 기세를 올렸다.
그날 밤 곽재우(郭再祐)는 심대승(沈大升)을 보내 의병 200여 명을 이끌고 향교 뒷산에 올라갔다. 그 곳에서 횃불을 들고 뿔피리를 불면서 적의 배후를 위협하였다. 7일 적은 하루 종일 총탄과 화살을 발사하였다. 8일에는 공격용 죽제(竹梯)와 3층이나 되는 누대(飛樓)를 만들어 침공해 왔다.
이에 김시민은 현자포(玄字砲)를 발사하고, 적이 성의 못[城濠]을 메우려고 모아 놓은 솔가지와 죽제를, 짚으로 묶은 화약에 불을 붙여 던져 불살랐다. 또 이동하는 적의 누대를 자루가 긴 도끼와 낫으로 부수면서 적을 무찔렀다.
고성의 임시현령 조응도(趙凝道)와 진주의 복병장 정유경(鄭惟敬)은 밤을 틈타 군사 500여 명을 이끌고 진현(晉峴)고개 위에 올라가 적을 위협하였다. 9일에는 성 밖에 머물러 있던 합천가장(陜川假將) 김준민(金俊民)과 정기룡(鄭起龍)·조경형(曺慶亨)이 왜군과 대결하였다.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임계영(任啓英)도 구원병 2,000여 명을 이끌고 와서 적을 견제하였다.
10일 사경(四更) 초에 적군은 2대로 나누어 1대는 북문 밖으로 쳐들어오고 1대는 동문을 공격해 왔다. 이들은 긴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올르면서, 그 뒤에 기병 1,000여 명이 조총을 난사하며 돌진하였다.
이때 김시민은 동문 북쪽에서, 판관 성수경(成守慶)은 동문 옹성(甕城)에서 군사를 지휘하였다. 이들은 죽을 힘을 다해 활·진천뢰(震天雷)·질려포(蒺藜砲)·돌과 불에 달군 쇠붙이를 던졌다. 또한 끓는 물을 붓거나 짚에 불을 붙여 던지면서 적의 공격을 막았다.
북문 쪽에서는 전 만호 최득량(崔得良)과 목사의 군관 이눌(李訥)이 분전하였다. 목사 김시민이 적의 탄환에 맞아 쓰러지자 곤양군수 이광악이 대신 작전을 지휘해 많은 적을 살상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 3대첩(三大捷)의 하나로 큰 전과를 올린 싸움이다.
1593년 6월 20일부터 29일까지 열흘 간 계속되었다. 명나라와 일본이 화의를 진행하고 있을 때 경상남도 일대를 본거지로 삼고 있던 왜군은 앞서 김시민에게 패한 것을 설욕하고, 강화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다시 진주를 공격하였다. 이 때 명나라는 회담을 이유로 싸움을 피하고 있었다.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전라순찰사 권율(權慄) 등이 조정의 명으로 의령에 도착했으나, 적의 기세에 눌려 후퇴하였다. 그러나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발분해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黃進), 의병장 고종후(高從厚), 사천현감 장윤(張潤)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에 들어갔다.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등이 먼저 와 있었고, 이어 의병장 강희열(姜希悅)이 도착하였다. 이 때 군사는 수천 명에 불과했고, 성 안의 주민은 6만∼7만 명으로 적의 대군과 싸우기에는 전투력이 크게 부족하였다.
게다가 목사 서예원(徐禮元)은 명장접대차사원(明將接待差使員)으로 오랫동안 상주에 있다가 진주로 급히 돌아와 미처 조처를 취할 여유가 없었다. 김천일이 지휘를 담당하니 주객 간에 어색한 점이 많았다.
적은 6월 21일 진주성을 포위하고, 22일부터 본격적인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성 안에서는 부대를 편성해 구역을 나누어 성을 지켰다. 황진·이종인·장윤 등은 각기 군사를 이끌고 돌아다니며 응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25일 적은 동문 밖에 흙을 쌓아 높은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흙집을 지어 성을 내려다보면서 탄환을 쏘아대기 시작하였다. 성 안에서도 주민들이 협조해 높은 언덕을 마주 만들어 거기서 현자포를 쏘아 적굴(敵窟)을 격파하면서 항전하였다.
26일 적은 나무궤짝에 생피(生皮)를 둘러 이것으로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자성(子城)을 헐기 시작하였다. 이에 성 위에서는 큰 돌을 굴리고 화살을 내리퍼부었다. 27일 적은 다시 철갑을 두른 채 쇠몽둥이로 성을 헐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종인이 뛰어난 완력으로 연달아 적 5명을 죽이니 적은 잠시 물러갔다.
적은 성의 밑뿌리를 파서 성을 무너뜨릴 심산이었고, 성 안에서는 이를 막는 데 사력을 다하였다. 적의 시체가 성 밖에 삼대[麻]처럼 깔려 있었지만, 적은 단념하지 않았다. 28일 큰비가 내려 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황진은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장수들은 동분서주하며 성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29일 적은 소가죽을 여러 장 덮은 구갑차(龜甲車)를 앞세워 동문 성벽 밑에 접근하고 무너진 성벽으로 난입하였다. 이종인은 군사들과 함께 활을 버리고 창과 칼로써 처참한 백병전을 벌였다. 김천일·고종후·최경회 등은 촉석루(矗石樓)에서 북향재배한 뒤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한편, 이종인·김준민·이잠(李潛) 등은 성 안에 있는 남녀들과 함께 칼을 휘두르며 시가전[巷戰]을 폈으나 역부족으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종인은 죽을 때 양쪽 겨드랑이에 적을 1명씩 끼고 남강에 뛰어들어 순사하였다.
또한, 의비 논개(論介)가 촉석루에서 적장을 안고 남강에 투신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적은 비록 진주성을 함락시켰으나 그로 인한 손실도 막대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