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송사(八送使)가 교역을 위한 정기적인 무역사절이라면, 차왜는 외교적인 현안 문제가 있을 때마다 임시로 파견된 외교사절이었다.
이 사절의 제도는 조선 전기에는 없었던 것으로 1609년(광해군 1) 기유약조(己酉約條)의 체결 당시, 상경을 요청한 대마사절에게 ‘도주차왜(島主差倭)’라는 명칭을 붙인 데서 시작되었다.
차왜의 역할이 정착되고 응접 기준이 정례화된 것은 1680년(숙종 6) 이후부터이다. 차왜 중에 특히 조선 정부로부터 외교사행으로 인정받은 차왜를 ‘별차왜(別差倭)’라고 하였다. 차왜는 그 사명에 따라 대차왜(大差倭)와 소차왜(小差倭) 및 기타 차왜로 구분할 수 있다.
대차왜는 막부나 통신사에 관한 사항을 취급했으며, 소차왜는 대마도주(對馬島主)나 기타 외교 업무에 관한 사항을 취급하였다. 그리고 특별한 외교 사항에 관한 기타 명목의 차왜가 파견되었다. 조선 후기 파견된 차왜의 실태는 다음 표와 같다.
차왜는 파견 목적이나 지참 서계(書契 : 조선과 일본정부와 왕복하던 외교문서)에 따라 편성 체제와 접대 규정이 달랐다. 대차왜는 정관(正官) 1, 도선주(島船主) 1, 봉진압물(封進押物) 1인, 시봉(侍奉) 2인, 반종(伴從) 16인, 격왜(格倭) 70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예조 참판·참의, 동래부사·부산첨사에게 보내는 서계를 지참한다. 왜관의 체류일은 60일이며 숙공일(熟供日 : 음식을 제공하는 일수)은 5일이다.
이외에 다례(茶禮)·연향(宴享 : 국빈을 위해 잔치를 벌임)·지공(支供 : 음식을 제공함)은 팔송사의 제1특송선과 같으며, 경접위관(京接慰官)의 접대를 받는다. 그리고 별도의 견선(遣船)·각선(脚船)·수목선(水木船)이 각각 1척씩이 있고, 각 선박마다 각각 20인의 격왜를 대동한다. 그리하여 대차왜는 모두 4척의 선단을 이루어 총 151∼153인이 도항하였다.
한편 소차왜는 정관 1인, 압물 1인, 시봉 1인, 반종 5∼10인, 격왜 30∼40인으로 구성되며, 예조참의·동래부사·부산첨사에게 보내는 서계를 지참한다. 왜관의 체류 일수는 대체로 55∼60일 사이이며 숙공일은 5일이다. 다례·연향·지공 등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관백고부차왜(關白告訃差倭)나 도주고부차왜(島主告訃差倭)와 같으며 향접위관(鄕接慰官)의 접대를 받는다.
그리고 소차왜는 1척이 도항하며, 38∼53인으로 구성하였다. 이와 같이 차왜는 각종 연향접대, 식량과 일용 잡물의 지급, 회사 및 개시무역에의 참가 등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보장받았다. 따라서 대마도에서는 가능한 한 많은 차왜를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으로부터 외교사행으로 인정받으려 노력하였다.
조선으로부터 외교사행으로 접대받기에 가장 좋은 명분이 관백(關白)이나 대마도주의 경조사(慶弔事)였고, 통신사행이나 문위행(問慰行)에 관련된 사항들이었다. 따라서 대마도주는 이 기회를 이용, 가능한 한 많은 왕래를 통해 무역량을 증가시켰다. 또한 조선에서도 이들을 허용하여 대마도주의 외교적 입장을 세워주어 조일관계를 안정시키고, 또 일본에 대한 정보 수집의 기회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