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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고려 · 조선 시대 역로(驛路)에 마련되어 공문(公文)을 중계하고 공용 여행자에게 교통 편의를 제공하던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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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 조선 시대 역로(驛路)에 마련되어 공문(公文)을 중계하고 공용 여행자에게 교통 편의를 제공하던 시설.
내용

원나라의 전명기관(傳命機關)인 참적(站赤)에서 유래된 것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역참(驛站)으로 통용되고 있다.

참적은 몽고족이 변경의 군사정보를 신속하게 중앙에 알리기 위해 설치했으며, 육참(陸站)·수참(水站)·보참(步站)으로 조직되었다. 또한, 참적에는 전달 수단으로서 우마(牛馬)가 확보되었으며, 그에 따라 우참호(牛站戶)·마참호(馬站戶) 등의 참호가 편성되어 백성을 동원하였다.

원나라의 역참 제도가 고려 후기 충렬왕 이후부터 설치되었는데, 육지에 주로 설치한 역참(몽고의 육참) 외에 수참을 설치하였다. 수참이란 수역(水驛)이라 한다. 1281년(충렬왕 7)에 육참을 설치하고, 이어서 1304년에는 탐라에서 압록강 연해까지 약 30여 개의 수참을 설치하였다.

수참은 참선(站船)을 두어 군량미·조세 운반, 나루[津]를 오가는 사람들을 규찰하는 구실과 물건을 실어나르는 걸 상호 보조하는 수상 교통 수단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따라서, 참이라고 하면 넓은 의미에서 역참과 수참의 총칭이다.

육참은 몽고 간섭 이후 원·명 교체기를 지나 조선 시대에 이르러 특히 동서양계(東西兩界) 지방의 행정 구역 개편과 더불어 그 조직이 확립되었다.

즉, 1398년(태조 7) 2월에 정도전(鄭道傳)이 북방 지방을 개척하고 행정 구역을 편성할 때 참도 동시에 설치되었는데, 그 인적 조직은 사리(司吏) 2인, 일수양반(日守兩班) 5인, 관부(館夫) 5인, 급주인(急走人) 5인, 마부 15인으로 편성되었다. 그 뒤 참에는 참리(站吏)·참일수(站日守)·조역백성(助役百姓)·노비가 배속되어 참역을 수행하였다.

참의 재원으로는 참부전(站夫田) 외에 아록전(衙祿田) 5결(結)이 지급되어 소요 경비에 충당되었다. 특히, 황해도 7참은 사신 왕래가 빈번해 어느 참보다 중요시하였다. 참의 명칭은 황해도·함경도의 역에 주로 사용되었고 평안도에는 주로 관(館)이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시대의 역은 역참, 관역(館驛)·우역(郵驛) 등으로 혼용되었다. →역참

참고문헌

『삼국사기』
『고려사』
『태조실록』
『태종실록』
『경국대전』
『증보문헌비고』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원사(元史)』
『關西·호남역지(關西·湖南驛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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