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가음정동고분군은 1993년 12월 27일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고분군은 가음정동 당산(73.5m)의 나지막한 구릉지대에 조성된 것으로 크고 작은 봉분 20여 기가 무질서하게 분포되어 있다. 그 사이사이에 다수의 중 · 소형 덧널무덤〔木槨墓〕이 흩어져 있어 마산 · 창원지역 내에서는 비교적 규모가 큰 고분군에 속한다.
이 고분군의 남쪽에는 삼국시대 초기의 야철지(冶鐵址)로 추정되는 성산 패총〔사적, 1974년 지정〕이 인접해 있다. 주변 지역에는 외동 고인돌과 내동 조개더미, 삼동동 독무덤군〔甕棺墓群〕이 위치해 있다. 1990년 11월 20일부터 1991년 1월 10일에 걸쳐 이 유적의 남서편 일부 지역을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현,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에서 발굴조사하였다. 확인된 고분의 수는 덧널무덤 9기를 비롯해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2기,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1기, 독무덤 2기, 소형 돌덧널무덤〔石槨墓〕6기 등 총 20기였다.
덧널무덤은 길이 3m 내외 소형으로 평면형태가 모두 장방형을 띠며 길이와 너비의 비율이 2.1 : 1 이상으로 세장한 편이다. 장축방향은 동서방향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 경우 매장주체부의 머리 방향은 쇠손칼의 날방향으로 미루어 보아 항상 동침(東枕)된 것으로 생각된다.
유구의 내부에는 덧널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는 흔적이 토층상의 함몰현상과 유물의 배치상태 등에서 짐작할 수 있다. 덧널은 유구의 중앙에 안치한 경우와 한쪽 장벽이나 단벽에 붙여서 안치한 것으로 나뉜다. 특히, 무덤구덩이와 덧널의 사이에는 점토와 깬돌을 섞어서 채워넣은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현상은 마산 · 김해지역의 덧널무덤 유적에서 다수 발견되는 것으로써 그시대 낙동강유역에서 크게 유행했던 덧널무덤의 축조경향으로 생각된다. 출토유물은 굽다리접시 · 짧은목항아리〔短頸壺〕 · 광구소호(廣口小壺) · 쇠화살촉〔鐵鏃〕 · 쇠손칼 · 덩이쇠〔鐵鋌〕가 주종을 이루며 약간씩 부장되어 있다.
앞트기식돌방무덤의 돌방은 반지하식 구조이며, 평면형태는 세장방형(제1호 돌방무덤)과 네모모양(제2호 돌방무덤)이 있다. 장축은 동서방향이며, 입구부가 서편 단벽에 마련되어 있다. 돌방의 천장돌은 1매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제1호 돌방무덤의 경우에는 돌방의 측벽 상단부가 돌방 내로 무너져 내부 주체시설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천장돌이 본래부터 횡가(橫加)되지 않은 대신에 나무뚜껑〔木蓋〕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돌방 내부에는 1회 정도의 추가장(追加葬) 흔적이 발견되며, 1차 주검받침〔屍床〕과 직교되도록 새로운 자갈주검받침〔礫石屍床〕을 설치하였다.
봉분의 직경은 8∼10m이다. 도랑〔周溝〕시설은 봉토의 북편에서 확인되었다. 이는 단순한 배수기능 외에 매장과 관련된 어떠한 의식을 거행하는 공간으로 활용된 것 같다. 출토유물은 짧은굽다리접시 · 아가리달린긴목항아리〔附加口緣長頸壺〕 · 뚜껑그릇〔有蓋盒〕등이 있다.
굴식돌방무덤은 반지하식으로 여러 매의 깬돌을 천장에 횡가한 터널식 구조이다. 돌방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이고 남쪽 단벽의 중앙에 짧은 널길이 설치되어 있고 널방 밖으로 길게 연장되는 무덤길〔墓道〕이 확인되었다. 주검받침은 3종류가 확인되고 있어 2회 이상의 추가장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출토유물도 크게 3개의 군집으로 나뉜다.
유물은 짧은굽다리접시 · 굽다리긴목항아리 · 쇠손칼 · 덩이쇠 등이 돌방의 동쪽과 북쪽 벽 주변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밑지름 11m, 높이 1.6m에 이르는 봉분 내에서는 5기의 소형 돌덧널무덤이 확인되었다. 이 중 4기는 제3호 돌방무덤의 봉분을 파고 설치된 것으로 보아 이 굴식돌방무덤의 주인공과 친연관계(親緣關係)에 있는 자들의 유구로 파악된다. 그 외 2기의 독무덤도 조사되었다. 규모가 1m 이내의 소형이어서 소아용이거나 2차장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음정동고분군은 덧널무덤이 중심 묘제로 사용되던 6세기 후반대까지 지속적으로 창원지역의 유력한 집단의 매장지로서 이용되었다. 이 지역은 일찍이 문화적으로 금관가야(金官加耶)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아 묘제에 있어 유사성을 보이지만, 6세기 중반 이후 가야세력의 급격한 쇠퇴와 함께 신라 문화권 내로 점차 흡수되어 갔다. 이 고분군은 이러한 역사 · 문화적 정황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