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불신 높이 251㎝, 머리 높이 70㎝. 비록 광배는 없어졌지만 보기 드문 거작이다. 그 장대함에 있어서 석조좌불로서는 석굴암 본존에 버금간다. 그러나 조각 수법은 석굴암 본존보다는 뒤떨어진다. 물론 논산 개태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이나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등 고려 초기의 석불에 비해서는 우수하다. 이에 따라 대개 통일신라 말기인 900년 전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체와 머리의 비례는 1:0.28로서, 887년에 조성된 경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비슷해 당시의 불상 비례를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등에 비해서는 비율이 좋다.
정수리에 솟아있는 육계(肉髻)는 그리 높지 않으며 머리카락을 표현하지 않은 소발(素髮)이다. 얼굴은 거의 사각형에 가까운 모습이다. 가늘고 긴 눈, 편편한 콧잔등, 작은 입, 길게 늘어진 귀 등은 당시 모든 불상에 나타나는 특징과 공통된다. 이러한 특징들은 858년에 제작된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에서부터 나타나는 새로운 양식적 특징이다.
거구이면서도 위축되고 탄력성이 줄어든 조각 수법은 새로운 시대적 특성을 반영한다. 즉, 무릎 폭이 얕고 좁아서 약간 불안정하고 위축되어 보이는 점이라든가, 전체적으로 긴장감이 줄어든 점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점은 비로자나불의 지권인(智拳印)이라고 하는 특수한 수인(手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역시 시대적인 특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느슨하고 형식화된 수법은 옷주름 선에서도 나타난다.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의 가사는 얇게 새겨 옷주름 선이 많이 드러나지 않고 형식적으로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하지만 옷주름은 비교적 유연하며 규칙적인 반복을 피하고 있다. 가슴에는 속옷인 승각기(僧脚岐)를 사선으로 새겼고, 배에는 띠 매듭이 있어 치마인 군(裙)을 착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손 모양은 왼쪽 집게손가락을 세우고 다른 손가락은 주먹을 쥐었다. 오른손도 주먹을 쥐고 왼손 집게손가락을 잡은 형태를 취하였다. 이 불상의 지권인은 꽤 사실적으로 묘사되었고 단정하며 강인한 인상을 준다. 그 모습은 867년에 조성된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유사하다.
대좌는 8각연화좌로서 하대는 16판(瓣)의 복련(覆蓮: 아래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으로 8각형을 이루고 그 위에는 3단의 굄돌이 있다. 위에는 높이 45㎝의 팔각간석(八角竿石), 곧 중대가 놓여 있다.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상대에는 반원형에 가까운 앙련(仰蓮: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이 두 줄로 교차되어 있다. 그리고 앞면에 3마리의 사자상과 용두 같은 것이 새겨져 있는데, 다른 대좌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식이다.
전체적으로 정제되고 균형된 모습을 보이지만 위축되고 긴장감이 빠진 모습이라든지, 탄력성이 줄어든 세부 표현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의 석불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불상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