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촌리고분군은 1981년 4월 1일에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지정면적은 239,010㎡이다. 초촌리 자라말 동쪽과 그 서쪽 무동산(舞童山), 척문리에 약 200여 기의 군집고분이 위치해 있다. 이 고분군 내의 무덤들은 모두 백제계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서 대부분 파괴되어 있었다. 1979년 3월에 전주박물관에 의해 파괴된 무덤들에 대한 정리조사와 함께 각 1기(基)의 돌방무덤과 독무덤〔甕棺墓〕의 발굴조사가 있었다.
돌방무덤은 쪼갠 바윗돌과 냇돌들로 쌓거나 면석(面石)을 사용해 축조하였다. 널길〔羨道〕은 널방〔玄室〕 앞면의 동편 · 서편 혹은 중앙에 설치하고, 천장돌은 3, 4매로 가로 맞춰 놓은 다음, 지름 6∼7m의 둥근 봉분으로 덮었다. 그 중에는 널길없이 앞면을 돌막음한 앞트기식〔橫口式〕도 있다.
돌방무덤은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① 제I형: 장방형의 널방 앞면에 동편한 널길을 설치하고, 네 벽의 상부를 안기울임으로 쌓아 천장너비를 좁혔다(M21· M43· M60호분). ② 제Ⅱ형: 장방형의 널방에 서편한 널길을 설치하고, 벽면 아래쪽에는 넓은 면석을 세우고, 위쪽은 쪼갠돌을 안기울임으로 쌓아 천장너비를 줄였으나, 뒷벽은 거의 수직이다(M13· M37호분). ③ 제Ⅲ형: 약간 너비가 넓은 장방형 돌방으로 앞면 양쪽에 귓기둥돌을 세워 입구 너비를 줄이고 중앙에 널길을 설치한 것이다. 그리고 아랫벽은 넓은 면석을 세우고 위쪽은 역계단상으로 안기울임하여 천장너비를 줄였으나, 뒷벽은 거의 수직이다(M3· M19· E10호분). ④ 제Ⅳ형: 너비가 좁은 장방형 돌방으로, 널길은 없고 입구는 냇돌로 막은 앞트기식이다. 쪼갠돌로 세 벽을 쌓았는데, 양측벽 위쪽만 안기울임하고 뒷벽은 거의 수직이다(N3· N53호분).
발굴된 M60호분은 무동산 남쪽 사면 평지에 위치하며, 봉분은 씻겨 없어졌고, 서남향으로 되어 있다. 널방은 길이 2.74m, 너비 1.26m, 높이 0.96m이며 동편한 널길의 바닥에는 냇돌이 깔려 있고, 천장은 5장의 돌로 덮였다.
널방 입구 쪽에서 뚜껑단지 2점, 보통단지 2점, 접시 2점, 가락바퀴〔紡錘車〕 1점이 출토되었다. 동쪽 벽을 따라가면서 쇠낫 1점, 쇠도끼 1점, 쇠칼 1점, 긴자루화살촉 3점이 출토되었다. 또한 널방 앞뒤에는 둥근 받침이 있는 관고리가 각각 한 쌍씩 있었고, 여기저기에 관못이 흩어져 있었다.
한편, M21호분에서는 여덟잎받침이 있는 관고리가 출토되었고, M120호분 독무덤에서는 작은 귀걸이와 잔구슬 등이 나왔다.
독무덤은 2개의 긴 항아리의 아가리를 맞대어 동서방향으로 놓았다. 전체 길이는 1.5m이며, 남 · 서변에는 돌돌림을 하였다.
돌방의 구조로 볼 때, M60호분(제Ⅰ형)은 공주지방의 금학리 1∼5호분 등 제2유형과 같으며, N3호분(제Ⅳ형)은 송산리 8호분 등 제4유형과 같고, E10호분(제Ⅲ형)은 남산록 20호 등 제5유형과 같다. 공주지방의 제2유형은 5세기 말∼6세기 초에, 제5유형은 6세기 후반경에, 제4유형은 송산리 벽돌방무덤〔塼室墳〕의 딸린무덤〔陪塚〕으로 보이므로 제2유형을 전후한 무렵에 해당한다.
척문리에 속하지만 초촌리의 맨 서쪽에 있는 고분에서 채집된 은판으로 만든 꽃장식〔銀花飾〕은 관모(冠帽)에 꽂아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다. 중국측의『주서(周書)』 · 『수서(隋書)』 · 『북사(北史)』등에 ‘관육품내솔(官六品奈率)’ 이상이 은화식을 꽂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연대는 6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된다. 국내에서는 전라남도 나주 흥덕리, 충청남도 부여 하황리 등에서 출토된 예가 있다.
M21호분에서 나온 여덟잎받침관고리는 지름 7.2㎝로서 비록 철제이기는 하나, 공주 송산리 5호분의 은제 여덟잎관고리와 모양 및 크기가 같으며, 송산리 1호분에서는 같은 형의 철제 관고리가 출토되었다. M60호분과 같은 둥근받침관고리는 척문리, 진주 수정봉 2·3호분 등에서 나왔다.
따라서 M21호분은 송산리5호분 등의 공주 제1유형과 가장 가깝고 M60호분보다 앞섰음을 알 수 있으며 초촌리 제I형은 6세기 전반에, 제Ⅲ형은 6세기 후반경에, 제Ⅱ형은 그 중간에 해당된다.
남원지방에서 백제식 고분군은 초촌리가 유일하다. 이는 공주 제2유형 고분이 유행할 무렵 백제가 이곳을 점유하였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러나『삼국사기』에는 그러한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다만『일본서기』계체기(繼體紀) 7년조에는 기문(己汶) · 대사(帶沙)지방이 백제 영유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513년(무녕왕 13)에 해당한다.
『한원(翰苑)』괄지지(括地志)에는 “기문하(基汶河)가 국남에서 동남으로 흘러 바다에 든다”라고 하는 기록이 있는데, ‘기문하’는 지금의 섬진강을 말한다.『양직공도(梁職貢圖)』의 백제국사(百濟國使)에는 백제 갓두리의 여러 작은 나라 가운데 상기문국(上己文國)이 포함되어 있다.
백제가 처음 양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은 502년이므로 이 무렵까지 남원지방에는 ‘기문’이라는 나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백제가 이곳을 차지한 것은 513년이며, 초촌리고분의 상한연대도 그 유물과 돌방의 유형을 통해 볼 때, 여기에 부합된다. 또한 남원은 삼국시대에 고룡군(古龍郡)으로서 기문(己汶 · 基汶 · 己文)과 고룡 등은 모두 ‘거물’, 즉 큰 물〔大水〕을 뜻하는 이름이다. 663년(문무왕 3)에 신라가 점령한 거물성(居勿城)도 실은 남원이다.
이와 같이 백제식 고분 200여 기가 군집된 곳은 금강 이남에서는 오방성(五方城)의 하나인 중방성(中方城)이 있던 고부지방을 제외하면 그 예가 없다. 이는 남원지방이 백제의 남방성(南方城)이었을 개연성을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