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하대 이래 촌락은 촌주층(村主層)으로 구성된 대감(大監)과 제감(弟監)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대감은 원래 중앙에서는 군직(軍職)이었으나 중앙정부의 지방통제력이 미약하였던 신라 말 고려 초의 변혁기에 그 변질되어 촌락의 수장 명칭으로 쓰여졌다. 이들은 지방사회에서 독자의 영역을 확보하고 지배기구인 ‘관반체제(官班體制)’를 형성하고 군사적인 자립성을 유지하면서 지방사회를 실질적으로 통치하였다.
지방사회에서 지배자이자 유력층으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던 대감 · 제감은 987년(성종 6)에 촌장 · 촌정으로 개칭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이들은 이제까지의 군사적 성격을 상실하고 지방행정의 말단기관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촌장은 1년 농사의 작황에 대하여 수령에게 보고하는 것을 주된 임무로 하고 있었으며, 촌류이삼품군(村留二三品軍)으로 추측되는 향병(鄕兵)의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그리고 향리(鄕吏)와 함께 각종의 조세를 수납하는 책임을 지기도 하였으며, 자기 군현의 관(館)과 역(驛)에 내왕하는 관인(官人)의 뒷바라지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기인(其人)과 함께 사심관(事審官)의 추천과정에 관여할 수 있었으며, 향리와 더불어 토지문서를 작성하는 데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촌장이 지방통치에 있어서 이속들과 대등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신분적 지위까지 대등한 것은 아니었다. 향리가 중앙으로부터 향직(鄕職)이 제수되어 전시과(田柴科)의 토지를 지급받았음에 반하여, 이들은 그렇지 못하였다.
촌장도 신분적으로는 일반 백성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경제력이 충실한 부민(富民)이었기 때문에, 고려 후기 이래의 사회적 변동기에 편승하여 권세가에 의탁하여 관직을 받거나 직첩을 위조하여 검교직(檢校職)을 모수(冒受)하는 등의 방법으로 점차 관인으로 성장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