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관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도승지, 지중추부사, 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계홍(季弘), 율보(栗甫)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13년(광해군 5)
사망 연도
1695년(숙종 21)
본관
전주(全州)
주요 관직
좌찬성
정의
조선 후기에, 도승지, 지중추부사, 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율보(栗甫). 할아버지는 최행(崔行)이고, 아버지는 최계창(崔繼昌)이며, 어머니는 이정경(李禎慶)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51년(효종 2)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정언(正言)·지평(持平)·장령(掌令)·집의(執義) 등을 거쳐 온성부사(穩城府使), 동부승지(同副承旨)·황해도관찰사·병조참지·충청도순무사·강원도관찰사·제주목사·대사헌·경기도관찰사·공조참판·대사간·개성유수·도승지·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였고, 좌찬성(左參贊)에 이르렀다.

그의 인물평은 “관직에 있으면서 법을 지키고 나라를 위해 진력하였으며, 또 청렴결백한 지조와 조용하고 겸손한 절개가 있었다. 세상의 논의가 분파됨에 있어서 옛 견해를 확고하게 지키고, 들떠 경박한 논의에 동요되지 않으니 사람들이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1686년(숙종 12)에 다시 도승지로 국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이 때 그는 시의(時議: 당시의 정세에 대한 논의)가 빗나가고 인심이 편벽된 것을 보고 벼슬길에 나올 뜻이 없어서 스스로 병을 핑계하고 서울 근교에 나와 물러나 있었다.

이후 관직 제수가 있을 때마다 마다하였으나, 국가에 길흉의 큰 예의 의식이 있으면 도성 안에 들어와서 잠깐 예를 치렀다가 곧 물러가곤 하였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참고문헌

『효종실록(孝宗實錄)』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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