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1998. 본명은 운일.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나 1943년 북청농업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광복 직전 연극배우로 출발하여 극단 민예(民藝, 1945), 예도(藝都, 1948)의 창단에 합류하고, 잇달아 예술극회·극협·배우협회(1954), 고려극단(1955) 등의 무대에서 「카츄샤」(1945, 민예)·「활민당(活民党)」(1946, 민예)·「청춘의 정열」(1946)·「지옥과 인생」·「원효대사」(1948, 대중극회)·「황진이」·「붉었던 서울」(1950, 예술극회)·「검찰관」·「무영탑」(1953, 극협)·「복통」(1954, 배협) 등에 출연하였다.
1957년 국립극장 무대감독이 된 뒤 신인소극장(동인극장으로 개명)을 창단(1958)하는 등 소극장운동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1950년대 말 연출 기회가 오자 「문제된 시간」(1959, 동인극장)·「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1961)·「전하(殿下)」·「고독은 외롭지 않은 것」(1962, 변기종 연기생활50주년기념, 국립극장)·「죽음 앞에 선 사람들」(1963)·「만선(滿船)」(1964, 국립극장)·「윤지경전(尹知敬傳)」(1973, 신협) 등과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1959)·「세빌리아의 이발사」(1960)·「마르타」(1961) 등을 발표했다.
1964년에는 연출로 5월 문예상 장려상을 받았다. 그의 연출은 연기와 무대감독 등 현장 경험에서 쌓은 든든한 기초를 바탕으로 한 치밀함이 특징이다.
1950년대 말 전창근(全昌根) 감독의 연출부에 들어가게 된 것을 계기로 1960년대 중반부터 영화계로 전향, 30만명 이상을 동원한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김수용 감독)와 「정동대감」(1965)·「두 여인의 집」(1970) 등을 기획·제작했다.
1970년대 이후엔 감독으로 나서 남자의 온갖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고 살아온 학생 신분의 바 여급이 도움 준 중년의 사업가를 사랑하게 되나 그가 파산의 위기에 몰리자 재기시키고 떠난다는 멜로드라마 「아빠라 부르는 연인」(1972)을 데뷔작으로, 「처녀 사공」(1972)·「안나의 유서」(1975)·「학창시절」·「딸 삼형제」·「젊은 도시」·「청춘 공화국」(1976)·「꿈초롱 둘이서」(1977)·「비둘기의 합장」(1978)·「혈우천하(血友天下)」(1982)·「인생극장」(1983) 등 11편의 작품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