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봄 만경대에서 학생들이 학교 주변 정리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어 그 해 6월 16일부터 19일까지의 기간에 걸쳐 북한의 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고고학연구실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무덤은 만경대의 북쪽 구릉에 위치해 있다. 무덤의 서쪽으로 약 2㎞ 떨어진 곳에서 고인돌[支石墓] 1기가 조사되었고 근처에서 청동제 유물과 쇠갈래창[鐵戟], 백색토기 등의 유물이 수습된 바 있다.
만경대고분은 단단한 암반층을 수직으로 곧게 파 내려가 지표 아래 1.2∼1.3m 깊이(남벽 부분의 길이는 0.5m)에 바닥을 형성한 후, 길이 3.14m, 너비 1.1m의 장방형(長方形) 무덤구덩이[墓壙]를 만들었다. 동·서·남 3벽은 직선을 유지한 반면, 북벽은 약 80㎝ 정도 바깥쪽으로 돌출되었다. 북벽이 돌출된 이유는 부장품을 안치하는 문제와 관련된 듯하다.
무덤구덩이의 바닥은 북쪽보다 남쪽이 약간 낮게 되어 있다. 무덤구덩이 내에서는 유기물질이 부식된 흔적들이 군데군데 보이기는 하나 널[木棺]의 사용 여부를 알려주는 증거는 찾지 못하였다. 무덤구덩이의 구조로 보아 널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무덤구덩이 내에서는 약간의 토기편과 청동거울[銅鏡], 굽이 달린 철제 귀달린항아리[鐵製耳附壺]등이 출토되었다. 토기편은 2개체분인데 모두 노끈 무늬[繩文]가 있는 회색으로서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태성리 움무덤에서 출토된 토기와 비슷한 환저(丸底)의 비교적 큰 항아리였다. 청동거울은 지름 10.3㎝인 원형의 백동질(白銅質)이다. 이 역시 태성리 움무덤에서 출토된 청동거울과 유사한데 청동거울의 뒷면에는 사엽좌(四葉座) 꼭지를 중심으로 하여 방격문(方格紋)의 네 모서리에는 유(乳)가 한 개씩 붙어 있다. 방격문의 네 변에는 새무늬를 각각 배치하고 그밖으로 이중의 톱날무늬띠를 둘렀다.
철제 귀달린항아리는 무덤구덩이의 북쪽 모서리에서 출토되었다. 높이 17.5㎝, 구연부(口緣部) 지름 14.3㎝이며, 손잡이 부분이 파괴되어 있었다. 이 밖에 정확한 출토 지점을 알 수 없으나 부근에서 길이 54.3㎝의 쇠갈래창[鐵戟]이 수습되었다.
만경대고분에서는 청동기시대∼낙랑군·고구려시기에 걸쳐 조성된 태성리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비슷한 토기와 청동거울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평양의 상리유적과 석암리고분 120호에서 출토된 바 있는 쇠갈래창은 낙랑지역 이외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당시의 전술 특히 기마전투와 깊은 관계가 있는데, 낙랑군 설치와 관련하여 중국 한대(漢代)의 무기체계가 그대로 이입된 형태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만경대고분의 조성연대는 대체로 초기철기시대인 서기전 1세기에서 서기 1세기대에 해당될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