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590년(선조 23) 호남 유림들이 김인후(金麟厚)의 도학을 추모하기 위해 장성읍 기산리에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어 1624년 복원하였으며, 1662년(현종 3) 지방 유림들의 청액소(請額疏)에 의해 ‘필암(筆巖)’이라고 사액(賜額) 되었다. 1672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1786년에는 양자징(梁子澂)을 추가 배향(配享) 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毁撤) 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신문(神門)·동서 협문(夾門)·전사청(典祀廳)·장서각(藏書閣)·경장각(經藏閣)·진덕재(進德齋)·숭의재(崇義齋)·청절당(淸節堂)·확연루(廓然樓)·장판각(藏板閣)·한장사(汗掌舍)·고직사(雇直舍)·행랑·창고·홍살문·계생비(繫牲碑)와 하마석(下馬石) 2개 등이 있다.
사우의 중앙에는 김인후의 위패가, 왼쪽에는 양자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전사청은 향례(享禮) 때 제수(祭需)를 마련해 두는 곳이다. 경장각에는 인종이 하사한 묵죽판각(墨竹板刻)이 보관되어 있고, 진덕재와 숭의재는 동재(東齋)·서재(西齋)로 수학하는 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청절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원내의 모든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되었다. 장판각에는 『하서집(河西集)』 구본 261판과 신본 311판을 비롯한 637판의 판각이 보관되어 있으며, 장서각에는 인종이 하사한 묵죽과 『하서집』 등 1300여 권의 책, 1975년 보물로 지정된 노비보(奴婢譜) 외 문서 69점이 소장되어 있다.
계생비는 향사에 제물로 쓸 가축을 매어 놓는 비로, 제관(祭官)들이 그 주위를 돌면서 제물로 쓸 것인지 여부를 결정한다. 1957년 사우를 우동사(佑東祠)라 현액(縣額) 하였으며, 1975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유물로는 벼루와 기준(奇遵)이 방문 기념으로 기증한 붓 등이 있으며, 재산은 전답 1만 2700평과 임야 10정보가 있다.
주요 전각들은 남북 자오선(南北子午線)을 중심축으로 하여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었다. 남북이 길게 장방형으로 담장을 쌓고 정면 중앙에 누문(樓門)인 확연루를 두었으며, 그 중심축 선상 북쪽에 청절당이 위치하고 있다.
강당 뒤쪽 좌우 대칭되는 곳에 동재와 서재를, 그 북쪽 따로 쌓은 담장 중앙에 내삼문(內三門)을 두고, 안쪽에 사당이 위치함으로써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수법을 이루고 있다.
확연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팔작기와집으로, 낮은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원기둥)을 세워 주두(柱頭)·첨차(檐遮)·소로[小累]·쇠서[牛舌]로 결구한 이익공식(二翼工式)을 이루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된 청절당은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정면 1칸, 측면 3칸의 온돌방을 하나씩 두었다. 이는 본래의 진원현(珍原縣) 객사를 1672년에 옮겨 온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 청절당은 장대석으로 마무리한 낮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쇠서 하나를 내어 초익공식(初翼工式)으로 꾸몄다.
가구(架構)는 5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의 평주(平柱) 위에 걸고,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친 일반적인 가구 수법을 이루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우동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으로, 전면 반 칸은 툇간(退間)으로 개방하였고, 나머지는 통간(通間)으로 되어 있다.
장대석은 바른 층 쌓기로 처리한 기단 위에 돌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전면 툇간의 초석은 단면이 팔각형인 장주형 초석(長柱形礎石)을 이루고 있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쇠서 두 개를 놓아 이익공식 구조로 되어 있으며, 처마는 부연(附椽)을 단 겹처마이고, 맞배지붕의 양쪽 박공에는 풍판(風板)을 달았다.
중요 전각 외에 진덕재·숭의재는 단순한 민도리집 양식으로 되어 있고, 목판고는 이익공식의 팔작기와집이다.
필암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