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창지(昌之). 함길도관찰출척사 한혜(韓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찬성 한계희(韓繼禧)이고, 아버지는 한사개(韓士介)이며, 어머니는 이유인(李有仁)의 딸이다.
진사로서 1509년(중종 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정언·지평·헌납·장령·사간 등을 역임하였는데, 흥원군(興原君)의 집에 도둑이 들어 잃어버린 우피를 그의 집에서 발견하였다고 하여 체직되기도 하였다.
1521년(중종 16)에 도감낭관(都監郎官)으로서 황제의 상(喪) 중에 자최복(齊衰服: 오복의 하나로서 약간 굵은 삼베로 지은 상복)을 입고서 고기를 먹음으로써 명나라 사신에게 모욕을 당하고 사절(士節)을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추고, 체직되었다.
1526년에는 사옹원정으로서 강원도에 가 봉례(奉禮)하였으며, 이후에 사간을 거쳐 응교로서 경연에 참여하였고, 좌우승지를 거쳐 1534년 6월 전라도관찰사로 내려갔다. 이듬해에 다시 경직을 맡아 대사성, 한성부우윤을 거쳐 다시 외직인 개성부유수, 경상도·충청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1538년(중종 33)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을 때에 사헌부에서는 재주와 국량이 졸렬하여 그 직을 감당하지 못할 자이므로 체직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전라도관찰사 재직시의 법의 봉행이 엄정하였으며, 개성부유수 등의 직임도 무난하게 수행했으므로 체직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충청도·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예조·공조·형조 참판을 거쳐 한성부 판윤·우윤·좌윤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