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전반 만보산(萬寶山) 사건, 만주 침략, 상하이 침공 등으로 중국 관민의 항일 감정이 고조됨에 띠리 한중 양국의 항일운동단체들은 더욱 긴밀한 협조체제를 이뤄 나갔다. 특히 임시정부는 김구의 특무활동을 효율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중국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1931년 말 김구, 김철(金澈), 조소앙(趙素昻)과 중국인 치추칭[稽翥靑], 우청칸[伍澄干], 쉬톈팡[徐天放], 민쿵모[閔公謀] 등은 예비회담을 가지며 중국의 실지 회복과 한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한국과 중국이 연합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할 것을 합의하였다. 그 결과 1932년 3월 20일 한중항일대동맹이 결성되었다. 한중민족항일대동맹(韓中民族抗日大同盟)이라고도 한다.
외무부 · 특무부 · 재무부와 상무위원의 조직체계를 갖추어 조소앙이 외무부장을, 치추인이 재무부장을, 김구가 특무부장을 맡았다. 이러한 조직체계는 대동맹이 특무활동을 전개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고, 이를 외교적 ·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구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의 특무활동을 비밀리에 후원하였다.
윤봉길(尹奉吉) 의거를 비롯하여 1932년 3월 말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의 사살을 위해 파견한 상해한인청년당(上海韓人靑年黨) 당원 이덕주(李德柱), 유진만(兪鎭萬)과 관동군사령관 혼조[本庄繁]의 폭살 계획으로 만주로 밀파된 최흥식(崔興植), 유상근(柳相根)에게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또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실행되었을 당시 국무원(國務院) 등의 피난구제금 용도로 재정 지원을 요구하였을 때, 피난 중인 조소앙에게 지원을 해주는 등 사후대책 마련 과정에도 관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