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진보(晉甫). 서성부원군한확(韓確)의 6대 손으로, 할아버지는 한부(韓頫)이고, 아버지는 한찬남(韓纘男)이다. 부인은 이담(李談)의 딸이다.
1613년(광해군 5) 5월에 진사 이위경(李偉卿) 등이 올린 김제남(金悌男)의 역모와 관련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과 모후도 아울러 토죄할 것을 청하는 상소에 연명하였다. 여기에는 그의 형제인 한오(韓晤)와 한급(韓昅)도 참여하였다. 이 일로 유적(儒籍: 유생의 가계·학통·학업 등을 기록한 문서)에서 삭제되고 과거응시 자격도 박탈되었다.
1614년에 문음으로 경기전참봉이 되었으며, 이듬해 유생 정시(庭試)에서 1등으로 합격, 직부전시되고 같은 해 별시에서도 합격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동방자(同榜者) 가운데에는 이이첨(李爾瞻)의 아들 이원엽(李元燁), 이정구(李廷龜)의 아들 이명한(李明漢), 한효순(韓孝純)의 아들 한이겸(韓履謙) 등이 있었다.
이때 한찬남의 두 아들의 과거급제가 답안지에 자표(字標)를 했거나 차술(借述)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나돌았다. 이후 정언·수찬·지평·겸사서·부교리·문학, 이조정랑, 응교·겸보덕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쳐 1621년(광해군 13)에 직제학이 되었다.
그는 거의 삼사에만 몸담고 있으면서 이이첨의 당여로서 언론창구 역할을 하여 상대 세력으로부터 배척을 받는 입장에 있었다. 이이첨 등을 비난하는 상소가 빗발치면, 당시의 삼사는 한희를 포함하여 ‘이이첨의 논의가 바로 삼사의 논의’라고 언급할 정도로 이이첨을 적극적으로 비호하였다.
1618년 허균(許筠) 역모사건에서 한찬남이 연루자 황정필(黃廷弼)의 공초(供草: 죄인이 진술한 신문조서)에서 거듭 거론되자, 한희가 추천한 금부도사 이전방(李傳芳)을 시켜 제거했다는 유희분(柳希奮)의 주장 등으로 서로 반목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마자 그 아버지는 복주(伏誅)되었으며, 이듬해 아버지의 죄에 연좌되어 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