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미 ()

불교
인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때 보림사 보조선사의 제자로 입당하여 도응의 법을 전수받은 승려.
이칭
시호
선각(先覺)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864년(경문왕 4)
사망 연도
917년(경명왕 1)
출생지
광주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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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형미는 보림사 보조선사의 제자로 입당하여 도응의 법을 전수받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선승이다. 905년 귀국 후 강진 무위사에 주석하였다. 태봉이 전라도 남부지역 일대를 석권하면서 궁예, 왕건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궁예의 의심을 받아 처형되었고, 이후 왕건이 즉위한 후 대사를 위한 사찰과 탑을 건립하도록 하고 선각대사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정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때 보림사 보조선사의 제자로 입당하여 도응의 법을 전수받은 승려.
가계 및 출가

형미는 통일신라 말 주1이다. 성은 최씨(崔氏)이며, 864년(경문왕 4) 무주(현 광주광역시)에서 출생하였다. 가지산문의 보조선사 체징(804~880)의 제자로 수학하였으며, 882년(헌강왕 8)에 주2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주요 활동

891년(진성여왕 5)에 입당(入唐)하여 홍주(洪州, 현 중국 강서성 남창)의 운거산에서 운거 도응(道膺)의 제자가 되어 법을 전하여 받고 905년(효공왕 9)에 서남해인 무주 회진(武州 會津)으로 귀국하였 다.

형미가 귀국하자 무주의 소판인 왕지본(王池本)이 강진의 무위사에 주석하도록 하여 8년간 주지를 역임하였다. 왕지본은 견훤과 관련된 인물로 여겨지는데, 형미가 속했던 장흥 가지산문의 주3가 후백제의 권역에 속해 있었으므로, 견훤의 귀의를 받았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912년(효공왕 16)에 태봉은 전라도 남부 지역에 대한 공략을 실시하여 이 지역 일대를 석권하였다.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에 의하면 이때 ‘대왕과 형미’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 ‘대왕’의 실체에 대해 왕건으로 보는 견해와 궁예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만남 이후 형미는 태봉의 수도인 철원으로 옮겨 가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나, 917년(경명왕 1) 궁예의 의심을 받아 처형되었다.

추모

919년(태조 2) 태조 왕건은 형미의 제자들에게 사찰을 짓고 탑을 세워 대사를 새 무덤에 봉안하도록 명하였다. 921년(태조 4)에 태조 왕건은 선각대사(先覺大師)와 편광영탑(遍光靈塔)이라고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사찰의 이름을 태안(太安)이라 하였다. 탑비는 대사가 입적한 29년 후인 946년(정종 원년)에 강진 주4에 세워졌다. 형미는 경유(慶猷), 이엄(利嚴), 여엄(麗嚴) 등과 함께 태조 왕건의 특별한 존숭을 받은 4무외대사로 꼽힌다.

참고문헌

원전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康津 無爲寺 先覺大師塔碑)」

단행본

최연식, 『한국금석문집성 19- 고려 3, 비문 3 -』 (한국국학진흥원, 2011)
한국역사연구회 나말여초연구반, 『역주 나말여초금석문(상)(하)』 (혜안, 1996)

논문

김성배, 「고려 건국기 태조 왕건의 선승 결연과 그 목적-왕건과 향미·경유와의 관계를 중심으로-」(『한국고대사탐구』 42,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22)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문자』 7, 한국목간학회, 2011)
주석
주1

선종의 승려. 우리말샘

주2

전라남도 구례군 지리산에 있는 절. 백제 성왕 22년(544)에 연기 대사(緣起大師)가 창건하였다. 현재 대한 불교 조계종 제19교구 본사로 되어 있다. 우리말샘

주3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에 있는 절. 송광사의 말사(末寺)로, 신라 헌안왕 4년(860)에 보조 선사가 창건하여 가지산파의 중심 사찰로 발전하였다. 또한 인도와 중국에도 보림사가 있어서 이 세 절을 합하여 삼보림(三寶林)이라 한다. 우리말샘

주4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에 있는 절.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창건하여, 관음사라 칭하였으나 조선 명종 10년(1555)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조선 초기에 세운 극락전과 그 벽화로 유명하다.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박미선(명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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