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미는 통일신라 말 주1이다. 성은 최씨(崔氏)이며, 864년(경문왕 4) 무주(현 광주광역시)에서 출생하였다. 가지산문의 보조선사 체징(804~880)의 제자로 수학하였으며, 882년(헌강왕 8)에 주2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891년(진성여왕 5)에 입당(入唐)하여 홍주(洪州, 현 중국 강서성 남창)의 운거산에서 운거 도응(道膺)의 제자가 되어 법을 전하여 받고 905년(효공왕 9)에 서남해인 무주 회진(武州 會津)으로 귀국하였 다.
형미가 귀국하자 무주의 소판인 왕지본(王池本)이 강진의 무위사에 주석하도록 하여 8년간 주지를 역임하였다. 왕지본은 견훤과 관련된 인물로 여겨지는데, 형미가 속했던 장흥 가지산문의 주3가 후백제의 권역에 속해 있었으므로, 견훤의 귀의를 받았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912년(효공왕 16)에 태봉은 전라도 남부 지역에 대한 공략을 실시하여 이 지역 일대를 석권하였다.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에 의하면 이때 ‘대왕과 형미’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 ‘대왕’의 실체에 대해 왕건으로 보는 견해와 궁예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만남 이후 형미는 태봉의 수도인 철원으로 옮겨 가 극진한 대우를 받았으나, 917년(경명왕 1) 궁예의 의심을 받아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