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경(虎景)은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의하면 태조 왕건의 6대조라고 알려져 있으며, 그의 아들은 강충(康忠)이다.
『고려사』 첫머리에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편년통록』의 내용이 「고려세계(高麗世系)」에 전재되어 있는데, 기록의 첫머리에 나온다.
호경은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 자칭하며 백두산으로부터 각처를 유랑하다가 개성(開城) 부소산(扶蘇山) 왼쪽 골짜기에 정착하고 이곳 여인과 혼인하여 가정을 마련하였다. 그의 집은 부유하였으나 아들이 없었고 활을 잘 쏘아 사냥을 일삼고 있었다. 어느 날 9명의 동네 사람과 평나산(平那山)에 사냥을 나갔다가 날이 저물어 굴속에서 자게 되었다. 이때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났으므로 혼자 이를 물리치기 위하여 굴 밖으로 나갔으나, 이미 호랑이는 자취를 감추었고, 별안간 굴이 무너져 굴에 있던 9명은 모두 압사하였다. 그리하여 이 산을 구룡산(九龍山)이라 개명하였다.
집에 돌아가 주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기 위하여 먼저 산신에게 제사를 올리자, 산신이 나타나, “나는 이 산을 지키는 과부인데 그대와 혼인하여 그대를 대왕으로 삼아 함께 주1을 베풀겠다.”라고 말한 뒤 호경을 데리고 사라졌다.
이때부터 주민들은 호경을 대왕으로 모시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호경은 밤마다 꿈에 보이는 사람처럼 본처에게 나타나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가 강충이며, 강충은 서강 영안촌(永安村) 부자의 딸 구치의(具置義)와 혼인하여 오관산(五冠山) 마하갑(摩訶岬)에서 살았다. 그후 신라의 풍수지리가 팔원(八元)의 말에 따라 부소산 남쪽으로 이사하여 송악군(松嶽郡)의 상사찬(上沙粲)이 되었으며 많은 재산을 모았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이제건(伊帝健)과 보육(寶育: 원덕대왕으로 추존)이라 하였다 전한다.
그가 백두산으로부터 왔다는 것에 입각해 왕건 집안을 고구려계 유민 출신으로 본다. 그러나 그가 성골장군을 칭했다는 면에서 보면 신라 계승 의식도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