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는 조선후기 우군칙과 평안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이다. 1771년(영조 47)에 태어나 1812년(순조 12)에 사망했다. 과거에 낙방한 뒤 풍수로서 각지를 전전하며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면서 사회모순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었고, 풍수로서 부호의 집을 드나들던 우군칙을 만나 반란을 모의했다. 향촌에서 성장한 세력과 상인·양반지식층까지 끌어들여 반란을 준비한 뒤 1811년 극심한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틈을 타 난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평안도 일대를 점령하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관군에게 패하면서 총을 맞고 사망했다.
본관은 남양(南陽). 용강(龍岡) 출신. 외숙 유학권(柳學權)에게 학문을 배웠고, 1798년(정조 22) 사마시에 낙방했으나 과거를 치를 만큼 경서에 대한 일정한 수준의 교양을 지녔다. 그와 함께 병서(兵書)나 제반 술서(術書), 특히 『정감록(鄭鑑錄)』 등에 통달하였다.
과거에 낙방한 뒤 벼슬길을 포기하고 풍수로서 각지를 전전하며 빈한한 생활을 하였다. 당시 과거제도의 부패상,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삼정의 문란 등으로 일반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을 체험하면서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가산에서 풍수로 부호의 집을 드나들던 우군칙(禹君則)을 만나 뜻이 통하자 반란을 모의하였다. 그는 시국에 불만을 품고 있는 자들을 이용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당시 향촌에서 부를 축적해 하층지배자로 진출한 계층과 황해도 · 평안도 일대의 사상인(私商人)에게 접근하였다.
또한 관로가 막혀 현실에 불만을 품고 있던 양반 지식층에게도 접근해 진사 김창시(金昌始) 등을 반란군에 끌어들였다. 한편으로는 우군칙과 친하게 지내던 이희저(李禧著)를 이용해, 대상(大商)들의 후원을 받도록 하였다. 즉, 정주성의 거부(巨富) 이침(李琛) · 김석하(金石河), 안주상인(安州商人) 나대곤(羅大坤), 송상(松商) 박광유(朴光有) · 홍용서(洪龍瑞)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또, 역사(力士)의 발굴에도 주력해 제상(蹄商) 홍총각(洪總角), 평민 이제초(李濟初) 등의 장수, 그리고 지략과 무용을 겸비한 우군칙의 제자 김사용(金士用) 등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가산 다복동(多福洞)을 근거지로 10여 년 간 준비한 뒤, 1811년(순조 11) 극심한 흉년으로 인심이 흉흉해진 틈을 타 난을 일으켰다. 난 초기에는 각지의 내통 세력의 도움으로 민폐를 끼치지 않고 엄한 군율에 따라 쉽사리 가산 · 곽산 등 7개읍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안주 · 연변의 진공을 앞두고 내분이 일어나는가 하면, 홍경래마저 부상을 당하자 사태가 불리해졌다. 더욱이 봉기의 주축 세력 가운데에는 그를 암살해 관군에 공을 세우려는 배반자도 생겨났다.
이런 가운데 박천 · 송림전투에서 관군에게 패배하면서 정주성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반란군은 고립된 정주성에서 4개월 간을 버티었으나, 결국 성은 함락되고 그도 총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는 조선 후기 사회가 가진 모순을 깊이 인식한 뒤, 사회변혁을 위해 치밀한 준비 끝에 거병해 반란 초기에 평안도 일대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층 농민들의 반봉건적인 저항력과 절실한 이해를 대변하지 못한 인식의 한계, 그리고 당시의 사회적 제약으로 끝내 실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