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몽초(夢初). 아버지는 김순서(金舜瑞)이다. 평안도 곽산 출신.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난(洪景來亂)의 주모자.
1810년(순조 10) 진사시에 합격한 진사로 홍경래 등과는 10년 전부터 거사를 모의하여 왔다. 부호이던 김창시는 군량의 준비와 운산 촉대봉금점(燭臺峰金店)의 광산노동자가 봉기군의 중심이 되도록 연락하는 일을 맡았다.
봉기군 가운데 북진군(北進軍)을 지휘한 부원수 김사용(金士用)의 모사로서 봉기의 이유와 당위성을 주장하는 격문을 지었다. 김사용과 함께 가산을 비롯하여 곽산·정주·선천·박천·태천·철산·용천 등지를 점령하여 봉기군의 세력 아래 두었다.
그러나 점령 이후 농민군을 제대로 조직하지 못하여 증강된 관군과 창의군(倡義軍)의 공격에 쉽게 패배하고 곽산으로 후퇴하였다. 다시 함종부사(咸從府使) 윤욱렬(尹郁烈)의 관군에게 밀려 쫓겨다니다가, 1812년에 철산의 농민 조문형(趙文亨)에게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