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원구(元九), 호는 만주(晩州). 경상남도 고성 출신. 홍해(洪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순각(洪純慤)이고, 아버지는 생원 홍이중(洪頤中)이며, 어머니는 현감 남충원(南忠元)의 딸이다. 구봉서(具鳳瑞)의 문인이다.
1627년(인조 5) 진사시에 합격해 장릉참봉(章陵參奉)이 되었다. 1641년 호조좌랑으로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했고, 병조좌랑을 거쳐 정언이 되었다. 그러나 1645년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다가 해운판관(海運判官)으로 좌천되었다. 1654년(효종 5) 예조정랑으로 다시 기용되었고, 문신정시(文臣庭試)에 급제해 인동부사(仁同府使)로 임명되었다.
1656년 성천부사(成川府使)·양재찰방(良才察訪) 등을 거쳐, 1659년 단양군수로 부임하였다. 그 곳에서 문교(文敎)에 힘을 기울여 사풍(士風)을 크게 진작시켰다. 1665년(현종 6) 해주목사와 1667년 서천군수, 1669년 영광군수를 역임했으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그 뒤 남원목사로 임명되어 임기를 마친 뒤 청주에 자리잡고 후운정(後雲亭)을 지어 그 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후운정은 최치원(崔致遠)이 세상의 명리(名利)를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을 산 높은 뜻을 잇기 위해 붙인 이름이었다. 그는 이 곳에 머무르면서 화양(華陽)에 와 있는 송시열(宋時烈)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시사를 담론하기도 하였다.
그는 늙어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과 세상사에 관해 시로써 표현하였다. 그러한 시가 수백 편에 이르렀다. 병중에서도 나라를 걱정해 수천 언에 이르는 상소문을 지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만주집』과 『존주록(尊周錄)』이 있다. 시호는 효정(孝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