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양신(良臣), 호는 수은(睡隱). 홍주원(洪柱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판서 홍만용(洪萬容)이고, 아버지는 태복시첨정 홍중기(洪重箕)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민서(李敏敍)의 딸이다. 개풍에서 대대로 살았으며, 김창협(金昌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96년(숙종 22) 사마시를 거쳐, 1699년 통덕랑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과옥(科獄)으로 급제자가 모두 삭방(削榜)되면서 한때 유배되었다. 그 뒤 아버지의 권고로 다시 응시해, 1706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전적·검열·설서·정언·수찬·문학 등을 역임하고, 전라우도감진어사(全羅右道監賑御史)가 되어 민전에 대한 양전(量田)의 필요성을 적극 주장하였다.
1718년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정부에서 그의 말을 받아들여 양전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옛날보다 짧은 자[尺]로 실시하려 하자 이를 강력히 반대하다가 파직당하였다. 이듬 해 충청도균전사(忠淸道均田使)에 임명되자 자의 부당함을 들어 한사코 사직하자, 결국 그의 뜻에 따라 옛 자를 사용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년) 병조참의·승지·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1721년 동부승지로 노론 4대신과 함께 세제책봉(世弟冊封)을 주장했다가 신임사화로 영암군에 유배되었으며, 다시 거제로 이배되었다. 1725년(영조 1) 은진에 양이(量移: 죄를 헤아려 멀리 간 귀양지를 가까운 곳으로 옮김.)되었다가 풀려나와 이조참의·대사성·대사헌·도승지·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가례원류(家禮源流)』사건으로 조정이 시비에 휘말렸을 때, 윤증(尹拯)을 강력히 비난해 한때 조정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전라우도감진어사 때에는 영남의 곡식 4만여 섬을 운반해 멀리 제주 사람들에게까지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경(忠敬)이다.